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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8화] 커피, 악마의 채찍일까 활력의 축복일까.

25. 01. 21. (화)

by 영글생

“아, 이제 그만 좀 눕고 좀 일어나!” 같은 말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듣는 기분이 다르다. 특히 몸과 마음의 여유가 없노라면, 작은 말투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기 마련이다. 최근 둘째가 이앓이를 한다. 젖니가 나며 욱신거리는 본인만 하겠냐마는 밤잠을 설치고 울어대는 통에 엄마, 아빠도 고통을 분담하는 중이다. 아내는 잠이 많다. 장모님은 어린 시절 아내를 너무 재워서 그런 것 같다고 하시는데, 아니다. 둘째가 아내를 많이 닮았는데 잠마저 물려받은 걸 보면 그냥 유전이다. 이앓이의 고통을 나누며 잠보 모녀가 잠을 설친 밤이 물러가면 집안이 적막하다. 작은 방에서 따로 푹 잔 첫째가 아침부터 집안을 헤집지만 반응이 없다. 내가 첫째 등원 준비와 집안일을 하는 동안에도 통 일어날 기미가 없다. 부드러운 아침을 위해, 대화함축(conversational implication)을 활용하여 아내를 깨운다. “여보, 커피 한 잔 내려줄까”


입장이 바뀌어 내가 잠에 취한 아침에 들어보니 이 말도 생각보다 정겹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차피 속뜻은 빨리 일어나서 함께 일하자는 것이니. 그래도 비몽사몽 간에 커피 한 모금을 머금으면 기계에 윤활유를 바른 것처럼 삐걱거리던 정신이 부드러워진다. 아침을 커피와 시작하게 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대학교 복학할 무렵 전국적으로 카페가 늘어나면서 카누처럼 분말형 아메리카노를 표방하는 제품들도 나왔다. 당시에 집에서 학교까지 자전거로 통학을 했는데 보통 아침 7시까지 도착했다. 흠뻑 흘린 땀을 씻고 그리고 찬물에 카누를 녹인 텀블러를 챙겨 교직독서실에 앉는다. 아직 등교한 사람들이 적어서 그런지 사방이 고요하다. 운동과 커피로 각성된 상태로 책을 보면, 세상 재미없는 교육학에도 바짝 집중하게 된다. 그때 들린 재미 덕인지 석사 전공을 교육학(교육공학)으로 골랐다.


교직에 들어서고 얼마 되지 않아 바리스타 2급 자격증을 따게 되었는데 사연은 이렇다. 초임지 교장선생님은 발령 첫날부터 쉽게 가르쳐야 한다고 당부를 하셨다. “우리 학교에는 수업 45분이 괴롭고 쉬는 시간 10분이 즐거운 학생들이 많습니다.” 농어촌 지역이어서 그랬을까. 수업에서뿐 아니라 삶이 흔들리는 학생들이 있었다. 세상에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데 억지로 수업을 듣게 해서 무엇할까. 그때 선배의 권유로 대안교육에 참여했다. 우리는 위기학생들만을 따로 모아서 정규 수업시간에 별도로 대안교실을 운영했다. 1주일에 2시간, 교실을 나온 아이들은 밝았다. 공원에서 공놀이를 하거나 계곡에서 물놀이를 하며 가까워진 후 하고 싶은 공부를 물어보니 뜻밖에 자격증을 따고 싶단다. 카페에서 알바라도 하려면 바리스타가 좋겠다는 한 학생의 제안에 졸지에 커피 공부를 시작했다. 아이들 사이에서 경쟁심이 붙었다. 내놓은 학교 성적과는 달리 커피 공부에서만큼은 옆 친구보다 못할 수 없다는 분위기다. 졸지에 선생들도 불안해졌다. 애들보다 1차 시험 성적이 낮으면 아마 졸업 때까지 놀림당하리라. 원두 종류와 산지, 배전과 추출 방식 등을 달달 외웠다. 덕분에 우리 여섯 모두 자격증을 땄다.


이듬해에는 멤버를 늘려서 교내 카페를 운영할 계획을 세웠다. 여기저기에서 예산을 끌어와 준비를 했는데, 하필 Covid-19 팬데믹이 터졌다. 대면 등교가 늦어지는 동안 비대면 수업을 제작하면서 한편으로는 로스팅을 공부했다. 음료 원가를 계산하니 저렴한 생두를 직접 볶으면 가격을 낮출 수 있겠다 싶어서. 로스팅은 바리스타 1급 과정인데 졸지에 선생님들과 모임을 만들어 스터디를 했다. 그 대안교실은 참 잘 됐다. 학교를 두 번이나 더 옮기고 이제 로스팅을 할 기회는 없지만 그때 한 공부 덕에 여태 즐겁게 커피를 마신다. 알고 마시면 더 재미있으니까. 요새도 교무실에서 시간이 나면 주문을 받는다. 주로 내려 먹는데 물 온도와 가루 굵기를 조절해서 최대한 취향에 맞춰 드리니 인기가 있다. 특히 신학기 서먹한 분위기 속에서 커피 한 잔 건네면 대화 물꼬를 트기에도 좋다. 아이들 덕에 내가 잘 배웠으니 이것도 교학상장이려나.


다반사(茶飯事)는 차를 마시고 밥을 먹는 일과 같은 일상적인 일을 뜻한다. 오늘날 우리가 선호하는 식음료가 차에서 커피로 바뀌었지만, 대중적인 애호는 오히려 더 커진 듯하다. 몇 해 전 <알쓸신잡>에서 정재승 교수가 커피를 선호하는 사회는 피로한 사회라는 이야길 했다. 카페인으로 우리 뇌를 속여 몸에 과부하를 주면서 더 에너지를 쓰는 사회라는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아침부터 서로에게 커피를 권하는 우리 집도 피로한 가정이다. 그래도 그 덕에 육아에 힘을 내니, 음용 습관을 멈추기 어렵다. 커피 없이도 활기찬 일상을 기약하며 오늘도 한 잔 내린다, 진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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