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에는 신을 수 없는 구두 한 켤레가 있어요
입동을 맞이하며 입지 않을 옷들을 정리했다. 선뜻 다가오지 않는 추위 때문에 얇은 긴팔들과 원피스 몇 벌은 옷걸이에 계속 걸어 두었다. 어제는 종일 우중충하고 비가 오는 듯하면서 천둥만 요란하게 치더니 오늘은 제법 따뜻하다.
눈의 여왕이 강림하기 전에 잠자고 있던 원피스를 입어봤다. 첫사랑을 하던 시절에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스타킹도 없이 짧은 원피스에 뾰족한 구두를 신고 다녔는데 지금은 아무리 껴입어도 몸이 덜덜 떨린다. 옷을 갖춰 입으니 칙칙한 얼굴이 거슬린다. BB크림으로 피부를 가려보고, 유통기한이 한참 지나버린 립스틱을 찾아 발라본다. 파마를 해도, 매직을 해도, 부스스한 머리는 머리끈으로 묶어준다. 가려졌던 통통한 귀가 드러났다. 남편이 생일이나 기념일에 한 번씩 선물해 준 귀걸이들이 몇 쌍 남아 있다. 몇 년 동안 귀걸이를 하고 다녔던 적이 없어서 그랬나. 작년부터는 새로운 친구를 받아 보지 못했다. 예쁘다고 사놓고 어느 계절에 입는 건지 몰라 꺼냈다 넣었다만 반복한 트위드 재킷으로 마무리하고, 현관 앞에 섰다.
작년에 친구 생일 선물로 구두를 사줬다. 상대방에게 대놓고 물어봐 결제만 했는데, 고맙다고 보내온 사진이 눈에 아른 거렸다. 신발장에는 운동화만 세 켤레, 털부츠, 장화, 먼지 쌓인 클릿슈즈가 한 켤레씩 있었다. 아무리 편한 게 좋다지만 이제는 거의 불러 주는 이가 없는 식장이나 중요한 모임, 이를테면 '나 잘 살고 있어' 같은 동창 모임에 얼굴을 비출 수도 있으니까 클래식한 검정 구두 한 켤레는 있어야지. 원래 신던 사이즈가 225cm였는데, 얼굴과 배에서만 찌던 살이 더 이상 갈 때가 없어 발에도 붙었는지 한 사이즈가 올라갔다.
택배가 도착한 날은 정신이 없었다. 현관에 상자만 던져두고 아이를 하원시키고, 저녁 식사를 하고, 잠에 들었다. 남편이 웬일로 분리수거를 해준다며 나가던 길에 구두도 꺼내 신발장에 넣어줬다. 갖기 전에는 필요한 온갖 이유가 떠오르는데, 막상 내 소유가 되면 허무하게 잊혀지는 물건 중의 하나가 됐다.
"오! 이쁜데." 마치 처음으로 발견한 것처럼, 설레는 마음으로 구두를 꺼냈다. 일 년 넘게 지났는데도 구두는 깨끗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조심스레 발을 넣어본다. 들어가는 느낌이 좋지 않다. 원래 새 신발은 좀 뻑뻑한 법이니까. 억지로 발을 구겨 넣었다. 구두가 흉하게 불룩 튀어나온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몇 걸음 걸어가 본다. 땅에 닿을 때마다 윽하고 소리가 절로 나온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운동화로 바꿔 신어보는데, 거울에 비친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한파가 오기 전에 호기롭게 집어 든 원피스를 벗어 다음 계절이 오기 전까지 봉인시켰다.
반품도 지나버린 주인 잃은 검정 구두는 아직도 신발장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