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뻑 비 맞아 보기
어렸을 때부터 물이 참 좋았다. 물이 모여 있는 곳이면 생각 없이 달려들었다. 목욕탕의 넓은 냉탕에서 개헤엄을 치고 있으면 추운 줄도 모르고 기운 빠지도록 팔다리를 휘저었다. 분명 주변에 물이 튀겼을 텐데 뭐라고 하는 이가 아무도 없었던 게 지금 생각하면 신기하다. 손에 꼽게 가는 해수욕장에서는 아빠가 오라고 손짓하는 물속으로 해맑게 다가간다. 어푸 물을 먹고 허우적거리다 수영이라는 걸 하게 됐다. 물장구치다 힘들어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몸이 둥둥 떠올랐다. 웅 하고 소리가 차단되고 쨍한 햇빛을 피해 구름을 보고 있노라면, 여기가 엄마 자궁 속이는구나 싶었다.
그날은 여름비가 시원하게 내렸다. 주말인데도 가족들은 나갈 약속이 없어 모두 집에 있었다. 장맛비 때문에 약속이 취소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텔레비전을 배경음악처럼 켜두었다. 유럽 어딘가였는데, 거기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외국인들이 하나같이 우산도 없이 태연하게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이상하네. 우리는 웬만하면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데. 우산이 없으면 비가 좀 잠잠할 때까지 지붕 밑에서 기다리거나 뛰어가는데.' 옷 다 젖을 텐데 괜찮나 걱정도 했다가 호기심이 일었다. 온전하게 비를 맞는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물 위를 떠다니는 것만큼 좋을까?
마침 아직 씻지도 않았다. 부스스한 머리가 그대로. 2층 현관문을 열어 빼꼼히 얼굴을 내밀었다. 세차게 내리는 비가 나를 부른다. 1층으로 내려가 대문을 열었다. 비가 머리에, 얼굴에, 옷에 반갑다고 격하게 인사를 해준다. 몇 분 만에 아주 흠뻑 젖어 버렸다. 영화의 주인공이 된 양 폴짝폴짝 뛰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 골목이라 다행이었다.
"나리야, 나리야, 뭐 하니?! 얼른 들어와!"
엄마가 문을 열어 다급하게 나를 불렀다. 물이 뚝뚝 떨어진 채 집으로 들어왔다.
"뭐야, 애, 왜 이래?"
오빠가 정신이 이상해진 거 아니냐며 못마땅해했다. 바로 화장실로 달려가 몸에 달라붙은 옷들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아까는 좀 더 과격하게 나를 안아주는 기분이었는데, 아쉽군' 배려있는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눈을 감았다. 이제는 비가 오는데 우산이 없다고, 옷이 젖는다며 뛰어다니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제, 오늘 비가 종일 내린다. 여름에 더위를 시키는 장맛비는 좋았는데, 겨울에 추적추적, 비라니... 아무리 비가 좋아도 오늘은 눈이 내렸으면 좋겠다. 그럼 혼자 비 맞는 경험이 아닌, 아이와 함께 눈의 추억을 쌓을 수 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