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보미 선생님 덕분에 하루를 살아갑니다
화요일 오전 11:26분, 진동이 울린다.
"서영웅 님 189번 가루약 조제로 1시간 30분 이상 소요될 예정입니다"
한 시간 후쯤, 한번 더.
"서영웅 님 약 조제가 완료되었으니 약국으로 오십시오"
문자를 확인하고 돌보미 선생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약 다 됐대요. 지금 찾아가시면 돼요."
"지금 영웅이 밥 먹이고 있어요. 다음 치료 가는 콜도 취소했고, 대신 금요일 오전에 갈 거예요."
나는 기계적으로 "아이고, 감사합니다. 제 대신 할 일을 잘해주셔서..." 하다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다행히 서로의 주변 소음으로 자연스럽게 묻혔다. 재빨리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을 마무리했다.
"지금 잘 먹고 있어요. 똘망하네."
그 자리에 내가 있어야 했다. 장애인 콜택시가 언제쯤 될까, 약이 빨리 돼야 하는데, 그보다 다음 치료시간 전에 밥은 먹여야 되는데, 안 자고 있으니 지금 먹여야 하나, 내 식사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겠지. 죄여 오는 심장을 잡고 고민하고 있었을 텐데, 담담하게 상황을 설명해 주시는 선생님에게 정말 감사했다.
올해 장애인 지원 서비스의 본인 부담금이 올랐다. 고작 월에 12,500원이 인상되었는데, 총 금액의 앞자리가 1에서 2로 바뀌자 괜히 금액이 커 보였다. 선생님은 노파심에 맞는 금액을 입금했냐는 확인과 함께 구에서 추가로 지원하는 시간을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라고 재촉했다. 내 기억으로는 작년에 이미 알아봤었다. 우리 구에서는 만 18세가 넘어야 되는 것을 알려 드렸는데 재차 물어보신 것이다. 성가셨다. 하루 식사 세끼에 치료실 셔틀 하는 것으로 부족한 금액인가. 맙소사.
선생님 덕분에 족쇄 없는 감옥살이에서 겨우 탈출했던 것을 잊었나. 2년간 아픈 영웅이를 데리고 안 가본 병원이 없다. 몇 개월 동안 대기를 하고, 매일 치료실로 향했다. 두세 달마다 3분도 채 안 되는 정기 검진을 위해 하염없이 기다리고 냉담한 의사 소견을 들으며 기진맥진해져 돌아왔다. 얹혀살던 친정집에 도착해 샤워기를 틀어두고 엉엉 울었다. 둘째가 찾아왔을 때는 기쁨보다 걱정이 앞섰다. 심한 입덧으로 귀에 봉지를 걸고 운전을 했다. 그래도 엄마보다 잘 볼 수 있는 이가 또 어딨냐고. 말도 못 하는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맡길 수 없어 마지막 달까지 미루다 잠시만 돌볼 사람을 찾아보자고 했다. 운 좋게 빠르게 선생님을 만났고, 인수인계 한 며칠 후 둘째가 태어났다.
그렇게 선생님과의 인연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선생님이 이용하는 장애인 콜택시는 시간이 들쭉날쭉하다. 30분도 채 안 돼서 될 때도 있고, 비나 눈이 오는 날들은 두 시간이 넘도록 안 잡힐 때도 있다. 나는 한두 번 써보고 도저히 시간을 맞출 수가 없어 포기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그렇게 잘 맞추시는지 모르겠다. 일 년에 손에 꼽는 특별한 일들을 제외하고는 휴가도 없이 영웅이의 스케줄에 항상 맞춰준다.
친정집에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로 이사를 했다. 다시 새로 시작해야 했다. 첫째가 다닐 병원들과 둘째의 어린이집을 알아보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도 1년만 버티면 만 6세가 되어 장애인 활동 보조를 신청할 수 있게 된다. 선생님이 뜻밖의 제안을 했다. 평일에는 선생님이 아이를 봐주고, 주말에는 우리 집에서 보내는 게 어떠냐고. 왜 굳이 먼 곳까지 가는 우리를 도와주시려는 걸까. 누워만 있고 움직임도 없는 아이니까 쉬워 보인건 아닐까. 힘들긴 하지만 역시나 가족 품에서 지내는 게 낫지 않을까. 결정해야 되는 날이 다가오는데 갈피를 못 잡았다. 선생님이 괜찮다고, 서로 맞춰보자고 하셨다. 그래. 일단 해보자.
매주 금요일마다 콜택시를 타고 영웅이를 데려와 전철로 돌아가신다. 나는 친정집 가는 것도 멀어져 자주 못 가는데, 띠동갑인 우리 선생님은 한 번도 투덜거리지 않는다. "해보니까 밥 세끼 먹이는게 여간 힘든 게 아니야. 엄마도, 친정도 힘들었겠어." 오히려 나를 공감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 나를 대신해 엄마 역할을 해주시는 선생님 덕분에 나는 오늘 독서를 하고, 글을 쓰고, 요리를 한다.
한 때는 활동 지원 보조금을 부모가 받을 수 있다면 좋았을 텐데 아쉬워했다. 그럼 내가 영웅이를 돌보면서 돈도 벌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이제는 오랫동안 선생님과 함께 하고 싶다. 내가 당연히 해야 되는, 밥을 먹이고, 병원을 다니는 게 심적으로 쉽지 않았다. 열이 심하게 났던 그날, 매일 두 번씩 버스를 타고 30분씩 아이를 보러 중환자실을 들락거렸던 날, 언제 퇴원할지 모르는 2인실에서 숨죽여 울던 시간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재생되었다. 사람들과의 연을 끊고, 나와 남편을 끊임없이 괴롭혔던 지난 날들.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과거와 감정에서 벗어나 현실을 마주할 수 있었다. 누군가의 봉사와 희생으로 잠시 엄마가 아닌 나로 살아간다. 아마도 영웅이는 평생 걷거나 말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나는 감히 꿈꿔보지 못했던 하루를 감사해하며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사는 게 힘들어 생을 빨리 마감하고 싶은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이 되길 바란다.
"선생님, 죄송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저 잘할게요. 가족도, 가까운 이웃도 쉽지 않았던 자유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게요. 한 아이의 인생만 돌봐 주시는 게 아니었어요. 제가 자유를 얻었고, 덕분에 둘째가 더 사랑받고, 남편이 마음 편하게 돈을 벌고 있었네요. 얼마나 편했는지, 셋째가 갖고 싶다 그랬지 뭐예요.
꼭 보답하고 싶어요. 선생님도 '보람된다, 이 아이 덕분에 잘 살고 있다' 느끼시게 항상 감사하는 마음 표현하도록 할게요. 영웅이의 엄마가 되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