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더라도 내 곁에 더 있어줘요
지난 일요일에 조카 생일 축하 겸 가족 모임이 있었다. 엄마는 그보다 이른 금요일에 영웅이와 함께 장애인 콜택시를 타고 와 우리 집에 좀 더 머물렀다. 내가 결혼을 막 준비할 즈음, 그러니까 한 10년 전부터 엄마의 입 안이 아프기 시작했다. 유명한 대학 병원의 각종 과들을 돌아다니며 검사를 했지만 나이 들면 다 이 정도는 아프다는 진단을 받았다. 오히려 건강한 거라고, 마지막은 건강염려증 등의 이유로 정신과를 추천했다. 이제는 차트에 기록이 남아 얼굴을 쳐다보는 둥 마는 둥 진료가 끝나고 만다. 말 한마디 얹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나에게 하소연을 했다. 분명 너무 아프고, 괴로운데, 이상이 없다고만 한다고.
아프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는 엄마를 위해 요리를 해본다. 맵지 않고, 부드러운 것들, 치아 사이에 끼지 않는 음식이어야 한다. 첫날 저녁은 리조토와 파스타. 20대에 꽤 자신 있는 메뉴로 엄마에게 요리를 선보였는데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간 탓일까 반찬이 너무 짜거나, 찌개라면서 탕이 되거나, 조리기만 하면 되는 닭날개가 타버리는 실수가 계속 됐다. 그때마다 거침없는 솔직한 평에 아직도 누군가에게 요리를 선보일 때는 긴장하게 된다. 한식이 주종목이었던 엄마에게 내민 크림 파스타는 처음으로 인정을 받았었다. 둘째 날은 소금과 식초물에 담가 쫄깃해진 연어회와 토마토를 곁들인 연어구이를 시작으로 은근하게 쪄진 부추, 양배추 사이에 누워 있는 오리고기로 마무리했다. 막상 요리하는 시간이 길지 않은데도 아침에 눈 뜨자마자 부엌으로 들락날락거렸다. 재료들을 손질하고, 재우며, 부족한 게 없는지, 그릇에 올라가는 순간까지 신경이 곤두섰다.
다행히 세끼 잘 드시고 댁으로 돌아가신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 딸, 밖이야?"
"응, 엄마는요?"
"방금 샴푸로 염색했다. 검은 머리 됐네."
"오! 사진 좀 보내줘. 가족 단톡에 올려줘요."
입 안의 통증을 호소한 뒤로 거침없이 나이를 드셨다. 몸무게가 급속도로 빠졌고, 로션도 바르지 않은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해졌다. 몸의 변화를 예민하게 받아들이시는 엄마는 두피에도 뭐가 나는 것 같다고 염색을 멈췄다. 다행히 나처럼 머리숱이 줄지는 않아서, 그저 백발노인이 되셨다. 친척 결혼식에도 흰머리에 잔뜩 힘주고 가셨는데 무슨 바람에 염색을 하셨을까. 받은 사진에는 거뭇해진 머리카락과 반쪽 짜리 얼굴이 있었다.
"오, 진짜 검은 머리 됐네. 좋은데, 근데 왜 나한테만 보내?"
"찌그러진 얼굴 뭐가 이쁘다고."
"염색 다 어떻게 됐는지 보고 싶은데, 다음에 내가 찍어줘야겠다!"
"됐어. 돈 필요하다고 하니까 너네 오빠는 대출받아서 쓰라고 하고, 이제 나보고 알아서 살라는 거지"
"그게 뭐야. 오빠도 혼자 벌어서 빠듯하고, 어차피 나중에 상속세 세금 같은 거 내야 되니까 대출받아서 쓰는 게 낫다는 이야기지. 엄마 챙기면, 또 친정 식구도 챙겨야 될 테고."
"그런 애가 일본으로 가족 여행을 가냐? 나는 가는 줄도 몰랐다."
"아니지, 전에 오빠가 여행 간다고, 엄마가 나한테 말했잖아."
"일본 간다고 하길래 가까운 국내나 가라고 했는데 벌써 갔다 왔는지 몰랐지."
"그 정도면 엄마한테도 이야기한 거지. 그럼 뭐 비행기 티켓 끊은 거에 날짜, 시간까지 알려줘야 되는 거야?"
"ㅎㅎ 그건 아니지만."
"거봐. 그리고 힘든 거 있어도 뭐가 좋다고 엄마한테 미주알고주알 말 하겠어?"
"그럼 너네도 힘드냐?"
"나도 힘들지."
"이야기해 봐. 얼마나 힘든지?"
"왜? 엄마 아프다고 할 때, 나도 아프다고 그랬더니 네가 더 한다고 뭐라고 할 때는 언제고."
"몰라. 아무튼 오빠는 떠났고, 너도 떠나는 중이야."
"무근 소리야?"
"지난번에 보니까 이제 너도 요리 잘하고, 걱정할 거 없겠더라. 날짜 보는 중이야."
엄마가 또 그러신다. 정확한 단어는 꺼내지 않았지만 잊을만하면 하시는 말씀이다. 빨리 생을 거두고 싶다는 말로 내 심장을 아무렇지 않게 후벼 판다. 아들도 아픈데, 엄마까지 이러면 어떡해. 처음에는 뒤돌아 엉엉 울었는데 이제는 내성이 나름 생겨 맞받아친다. 이러다 내가 농담처럼 받아들이는 순간에 정말 현실이 될까 겁이 난다.
"아니야. 나 아직 엄마 필요해. 엄마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의지가 되는데. 엄마가 그렇게 결정하면, 나중에 내가 힘들 때마다 무슨 생각 들겠어? 그냥 죽으면 되는구나. 살아서 뭐 하지?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
"너는 아직 할 일이 있잖아. 애들도 키워야 되고. 나 점점 더 아파. 지긋지긋해."
"아프면 다 죽어야 되는 거야? 그럼 영웅이도 죽어야겠다."
"영웅이는 다르지, 나는 내 의지인 거고."
"그럼 루게릭병 걸린 농구선수나, 손 하나 꼼짝 못 해도, 병원 설립이니 열심히 사는 사람들은 뭐야?"
"걔들은 병명이라도 있잖아. 나는 뭔지도 모르고."
"몇 년만 더 살자. 나 돈 많이 벌 때까지만 기다려 달라니까. 지금은 남편돈이니까, 그때는 내가 돈 줄게."
"ㅎㅎ 얼마나 주려고? 그 돈으로 뭐 해? 어차피 치료도 못하는데."
"그럼 맛있는 거 먹고, 여행 다니고, 나랑 놀면 되지. 안 해본 거 해보고, 응?"
엄마가 수긍을 했던가, 결론이 어떻게 됐더라. 어떤 말을 해도 확고하셨던 것 같은데, 딸의 간절함이 조금은 통했으면 좋겠다. 고통으로 인한 엄마의 결심을 어떻게 받아 드려야 할지 모르겠다. 상황이 힘든 것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유별나다 싶기도 했다.
마침 읽고 있던 책, 로렌 헨델 젠더가 쓴 '어떻게 나로 살 것인가', 의 끝부분에서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옛날부터 전 세계적으로 허무주의에 대한 고찰이 있었다. 엄마가 특이한 게 아니었다. 환자들은 고통 때문에 죽음을 앞당긴다고 말하지만 실상은 삶의 무의미함, 우울, 절망 때문이었다. 단 몇 개월을 살 수 있는 시한부의 인생에도 살아가야 하는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엄마 본인만이 마음을 바꿀 수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까 고민해 본다. 세 달 전쯤 엄마 명의로 가입한 1인가구지원센터 홈페이지를 뒤적거렸다. 40대 이상의 중장년을 위한 만두를 빚는 모집 안내문이 보였다.
"엄마, 봤어요? 만두 빚기 어때?"
"이런 건 어디서 봤냐? 뭐, 시간은 될 것 같은데."
"그럼 내가 엄마 대신 신청할게!"
"알았어."
자식들을 키우는 게 엄마의 마지막 사명이었을 것이다. 둥지를 떠난 우리지만 엄마의 존재는 영원히 필요하다는 것을 간과하고 계신 건 아닐까. 아픈 엄마라도, 비판적이고 거친 엄마라도, 부디 이 세상에 오래 계셨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