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분히 기어 다녀야 잘 걸을 수 있어요
문화센터에 간 둘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의자에 앉아 책에 막 빠져들 때였다.
"와, 그게 뭐예요?"
"워킹 벨트라고 걸음마 도와주는 거예요."
"요즘 정말 좋은 용품들 많이 나온다~"
"그죠? 이거 있으면 넘어질 위험이 없어요."
아이들을 주시하고 있던 학습지 영업사원과 남자의 대화였다. 고개를 들어보니, 남자의 손에 꼭두각시 인형 마냥 달려있는 아기가 있었다. 내가 키울 때는 그런 거 없었는데 세상 너무 좋아졌다며 부러운 듯 대화의 물꼬를 튼 영업사원 말에 그는 한껏 자랑스럽고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괜찮아! 아빠가 잡아줄게."
아기는 방향 전환에 실패해 넘어질 듯 위태로웠다. 동시에 아빠 팔의 힘줄이 흉측하게 불뚝거리더니 무릎에 들었을 퍼런 멍도, 소란스러운 울음도 피할 수 있었다. 위기를 극복한 아이의 표정이 왠지 만족스러워 보이지 않은 건 기분 탓일까.
나도 나름 4년 전에 아기를 낳은 신세대 엄마다. 친구가 늦은 100일 축하 선물을 골라 보라기에, 아픈 첫째 때는 써보지 못한 점퍼루를 부탁했다. 이제 배나 밀며 집을 탐험하는 아기에게는 조금 일렀지만 별도로 보관할 곳도 없어 거실 한구석을 오래 차지했다. 오다가다 언제 커서 저걸 써보나 싶다가 슬쩍 아이를 넣어봤는데 어리둥절하다 곧 기이한 돌고래 소리를 내며 좋아했다. 덩달아 방에 계시던 친정어머니도 나와 구경을 했더랬다.
오랜만에 첫째 치료실을 따라나섰다. 둘째와 함께 엎드려 놓고, 누가 먼저 고개를 가누나 지켜봤던 게 엊그제 같은데. 영웅이는 여전히 그대로이고, 영재는 어느새 형의 발달을 다 따라잡았다. 치료실 선생님에게 책장을 붙들고 서있는 아이를 지나 점퍼루에서 노는 영웅이 사진을 자랑하며 슬쩍 보여줬다. 선생님이 "아이가 이제 몇 개월이죠?" 하면서 걱정스럽게 물었다. 점퍼루가 보행에 도움이 안 될뿐더러 도리어 위험해 외국에서는 금지되거나 권장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 시기에 맞는 발달을 충분히 느끼고 커야 나중에도 제대로 된 성장을 할 수 있다고. 최대한 오래 기어다는 게 좋다고. 나는 얼굴이 불현듯 타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날은 한참 핸드폰 스크롤을 오르내렸다. 영웅이도 좋아하고, 나도 마음 놓고 눈을 뗄 수 있어 한숨 돌릴 수 있었는데, 뒤통수를 맞은 기분이었다. 이제라도 알게 된 게 어디냐. 바로 내다 팔 수는 없고, 정말 필요한 순간에만 잠깐 이용하기로 했다.
인기 있던 용품 중에 점퍼루 말고, 미아방지끈도 있었다. 처음에는 저렴한 가격에 신박하다 싶어 장바구니에 바로 넣었지만 구매까지는 망설여졌다. 아무리 줄을 길게 늘어 트려도 자유를 상실한 듯한 개가 떠올랐다. 어차피 엄마 곁에 딱 붙어 있는 아이이고, 내 눈동자도 종일 영웅이만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우리가 서로 떨어져 찾을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 과보호니 아동학대의 논란을 일으켰지만 여전히 잘 팔리고 있는 품목이다.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많은 물건들이 매일 쏟아져 나온다. 꼭 돈 벌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좋은 취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들도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 처음으로 겪는 육아의 현실에 당황하고 좌절하며 최신식 용품들에 의존하게 된다. 이건 우리 아이에게 맞지 않아서 힘든가, 다른 물건을 또 구매한다. 좀 나아 지나 싶다가도 다른 어려움이 찾아온다. 이러나저러나 힘든 건 마찬가지다.
이제는 그냥 흘러가는 대로, 좌절하도록 놔두고 싶다. 언제까지 따라다니며 아이가 엎어질까, 형들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공부를 할까, 결혼을 할까, 지켜볼 수 없는 노릇이다. 넘어지고 스스로 일어나는 대단한 경험을 할 수 있도록 응원해 보자. 흙으로 몸을 더럽히고, 계절 따라 바뀌는 꽃내음 맡다 보면, 어느새 나보다 더 커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