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3주 금요일
오늘도 분주한 아이들의 놀이 현장.
단연 인기가 높은 역할놀이 코너에서 옹기종기 모여 이야기가 한창입니다.
소꿉놀이 공간에서는 오늘은 무얼 만들까, 아기 인형을 돌보고, 청소를 하고, 작은 냄비에 뭔가를 끓이며
저마다의 역할을 맡아 바쁘게 움직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블록으로 건물을 세우고 로봇을 만들고 자동차를 만드는 등 이리저리 조립하고 분해하고 분주한 손길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자연스레 두팀으로 나뉘어진 활동코너에서 두드러지게 눈에 띄는 것은 여자친구와 남자친구의 명확하게 구분되어 있는 역할입니다. 자연스레 여자친구들은 요리를 하고, 남자친구들은 건축놀이에 몰두합니다.
놀이 뿐 아닙니다.
여자는 분홍, 남자는 파랑으로 구분하며 색깔에도, 말투에도, 심지어 감정 표현에도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습니다.
"남자는 울면 안 돼." "여자애가 왜 그렇게 뛰어다녀?"
이런 말들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이래야 한다'는 약속처럼 자리잡고 있는 건 아닐까요?
누가 먼저 그런 약속을 만든 걸까요?
아이들 스스로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무심코 보여준 모습과 말들이 아이들의 놀이 속에 스며든 걸까요?
그 약속은 아이들의 상상력을 제한하기도 하고, 자기다움을 표현하는 길을 좁히기도 합니다.
'넌 여자니까 이걸 해야 해.' '남자애가 왜 그런 걸 해?'
이런 말들이 아이들의 놀이 속에 스며들어 아이들의 선택을 조용히 조율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경계없는 존재로서의 아이들.
분홍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도 있고, 인형보다 자동차를 더 좋아하는 여자아이도 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저 '자기다움'일 뿐입니다.
그 다름은 틀림이 아니라 자신을 표현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입니다.
아이들의 놀이에는 사회적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역할놀이 속에서 자신이 본 세계를 재현하고, 그 안에서 자신을 대입하고 타인을 상상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선생님은 놀이를 단순한 활동이 아닌 '사회적 학습의 장'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 속에는 그들이 경험한 가족, 미디어, 사회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고, 그 안에서 어떤 역할이 누구의 몫인지에 대한 암묵적인 규칙이 형성됩니다.
예를 들어, 소꿉놀이에서 늘 '엄마'역할을 맡는 여자아이, 자동차를 고치거나 로봇을 만드는 '아빠'역할의 남자아이와 같은 반복은 단순한 놀이가아니라 사회가 기대하는 성 역할을 내면화 하는 과정일 수 있습니다.
이때 선생님의 역할은 관찰자에 머무르지 않고 그 규칙을 부드럽게 흔들어주는 질문자이자 제안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 모두가 셰프가 되볼까?"
"아기를 돌보는 역할은 누구든지 할 수 있어."
"여기는 병원, 간호사 역할 해 보고 싶은 사람"
이런 질문과 안내는 아이들에게 성역할에 허용의 메시지를 주고, 자기다움을 탐색할 수 있는 새로운 문을 열어줍니다. 선생님의 한마디는 아이들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자신을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줍니다.
놀이 환경 역시 아이들의 선택을 유도하는 무언의 언어입니다.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 다양한 소품과 색상, 중립적인 직업역할, 다양한 가족 구성의 인형등을 통해 아이들이 더 넓은 상상과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합니다.
환경은 아이의 행동을 이끄는 배경이자, 자기다움을 표현할 수 있는 무대가 됩니다.
그 무대가 다양하고 열린 공간일수록 아이들은 더 자유롭게 자신을 탐색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놀이를 통해 아이들은 세상을 배우고,
선생님을 통해 자신을 믿는 법을 배웁니다.
아이에게 건네는 질문 하나, 환경을 구성하는 방식 하나가 아이의 세계를 바꾸는 시작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아이의 놀이속에서 자라난 '자기다움'이라는 이름으로 조용히, 그러나 단단히 피어날 것입니다.
ㅣ 나는 아이들의 놀이 속에서 어떤 고정된 역할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었을까요?
ㅣ 내가 무심코 던진 말이나 놀이 환경이 아이들의 선택을 제한한 적은 없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