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주, 화요일
아이들이 초 몰입하는 활동 중 하나는 만들기 시간입니다.
특히 과학활동시간에는 실험도구들을 매뉴얼에 따라 직접 만들어 내는 과정 속에서 성취감을 얻기도 합니다.
오늘의 미션은 잠망경 만들기입니다.
잠망경은 잠수함에서 사용하는 두 개 이상의 거울을 이용해서 물속에서 수평선 위나 상공을 내다볼 수 있게 하는 장치입니다. 빛의 반사 성질을 이용한 장치로 기다란 관을 지나 물체를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통을 접고 거울을 붙이는 손길 하나하나에 섬세함도 필요한 작업입니다.
잠망경 만들기에 집중하느라 여느 때의 시끌벅적한 교실에 고요한 정적이 흐릅니다.
종종 '선생님, 도와주세요'라는 도움 요청 외에, 들리는 소리는 테이프를 커팅하고 붙이는 소리뿐 이였지요.
그때, 갑자기 한 친구의 목소리가 이 고요를 깨트립니다.
"선생님, 여기 물이 있어요. 갑자기 물이 생겼어요"
그 이야기에 모든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고, 아이의 말대로 책상 밑으로 물이 흥건히 고여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웅성거림 속 한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그 아이는 물을 발견한 아이의 옆자리 친구였습니다. 흥건하게 고인 물에 대해 한 마디씩 이야기를 더하고 있는 사이, 그 아이의 얼굴에는 어쩔 줄 모르는 당황함으로 점점 붉은색을 더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아이가 큰 소리로 말했습니다.
"다은이가 쉬 쌌나 봐, 너 쉬 쌌어?"
상황파악이 됐다는 듯, 직설적인 친구의 물음에
다은이는 "아니야!"라고 강하게 부정했고, 주변의 친구들은 더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거짓말, 너 자리 밑으로 물이 흘렀잖아. 너 바지 한번 만져보자. 정말 쉬 안 한 거 맞아?"
다른 친구들도 하나둘 다은이 옆으로 몰려들었습니다.
"아니야! 아니라니깐!!" 다은이의 강한 부정에 친구들은 더 이상 다가가지 못하고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자, 모두 자리에 앉으세요~" 아이들 모두 자리로 돌아가도록 안내하고
당황함과 창피함, 화남의 뒤섞인 다은이를 바라보며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를 건넵니다.
"아까 다은이가 물통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쏟아졌나 보다. 그렇지?"
다은이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친구들에게 잠망경 만들기 작업을 마무리하도록 하고 다은이와 함께
화장실로 향합니다.
"다은아, 화장실 가는 걸 놓쳤구나?"
여전히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다은이에게 말을 이어갑니다.
"다은아, 괜찮아. 누구든 실수할 수 있어. 특히 무언가에 집중했을 땐 화장실 가는 걸 놓치기도 할 수 있어.
선생님도 어렸을 때 그런 적이 있는 걸~ "
선생님의 실수담을 듣고, 바라보는 커다란 눈망울에 '정말이요?'라는 물음이 담겨있습니다.
그 뒤로 선생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가 이어졌고 긴장했던 아이의 숨소리도 다시금 편안해지고 있음이 느껴졌습니다.
오늘 다은이의 '아니야!'라는 말을 '거짓말'이라 이름하고 싶지 않습니다.
자신의 실수와 창피함을 피하고 싶은 다은이만의 보호색이었고, 나는 그 보호색을 지켜주고 싶었습니다.
유아기는 자존감의 씨앗이 심어지는 시기입니다.
아이는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어떤 반응을 받는지를 통해 자기 자신을 알아가며 성장해 갑니다. 그 과정에서 실수는 자존감의 가장 민감한 시험대가 됩니다.
실수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실수를 마주한 아이에게 어른이 어떤 태도로 반응하느냐입니다.
아이들은 실수한 순간보다, 그 순간에 들은 말과 표정을 오래 기억합니다.
“괜찮아”, “선생님도 그랬어”, “누구든 그럴 수 있어”라는 말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
아이에게 ‘나는 실수해도 괜찮은 존재’라는 메시지를 남깁니다.
유아는 아직 감정을 언어로 정교하게 표현하지 못합니다. 부끄러움이나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 부정하거나
회피하는 말은 진짜냐, 거짓이냐의 도덕적 판단의 대상이 아니라 자기 보호의 방법입니다.
그 말속에는 “나를 지켜줘”라는 조용한 마음의 신호가 담겨 있습니다.
그 요청을 알아차리고, 감정의 언어로 반응하는 선생님의 섬세함은 아이의 자존감을 지켜주는 가장 따뜻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입니다.
또래의 시선도 아이에게는 거울입니다.
친구들의 말과 반응은 아이가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지에 큰 영향을 줍니다.
자신의 실수나 부족한 부분을 놀림이나 확인하려는 행동은 당사자인 아이에게 위협이 될 수 있고,
그 순간 선생님은 단순한 중재자가 아니라 공감과 배려를 경험하는 조율자가 되어야 합니다.
자존감은 성공과 성취를 통해서만 자라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실수했을 때, 그 실수를 어떻게 받아들여졌는가가 아이의 내면을 더 깊고 단단하게 만듭니다.
다만 실수한 아이의 감정을 보호해 주는 것과, 실수를 외면하게 만드는 경험은 다릅니다.
선생님은 아이의 감정을 먼저 품어주되, 그 실수를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자도 되어야 합니다. 아이의 실수를 따스하게 안아주되, 다음엔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할 수 있도록 조심스레 길을 열어주는 것, 그것이 유아기의 자존감을 키우는 진짜 교육입니다.
ㅣ 아이가 숨고 싶을 때, 나는 그 마음을 지켜주는
어른이었을까요?
ㅣ 실수를 감추고 싶은 아이의 마음을, 우리는 어떻게
품어주고 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