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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지만 완벽한 '진짜 놀이'

12월 1주, 수요일

by thera 테라

교실 한가운데 담요와 박스가 놓입니다.

아이들의 레이더망은 선생님들의 그것보다 더 넓고 예리해서 원에 있는 소품들의 위치는 아이들이 더 빨리

찾아내고 기억해 내곤 합니다.

배달된 교재가 담긴 박스를 비우고 다른 반에 있던 담요를 가져와 그들만의 기획이 시작됩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그것을 'E1반 기지'라 이름 붙이고, 즉석에서 만든 현판을 당당히 걸어 둡니다.

작은 손들이 분주히 움직이고,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 반짝이며 서로의 상상 속 세계를 연결합니다.

그들의 놀이가 무르익을 즈음, 지훈이가 갑자기 새로운 규칙을 선포합니다.


"이제부터 여긴 말하면 안 되는 공간이야. 오직 몸으로만 이야기해야 해"


순식간에 협의된 지령은 한창 시끌벅적이던 교실을 침묵에 잠기게 합니다.

아이들은 서로의 몸짓을 해석하려 애쓰다 답답해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오해로 인해 엉뚱한 행동을 하며 넘어지기도 합니다. 순간 이를 한 발치 떨어져 모른 척 지켜보던 선생님은 혹시나 다칠까 앉아있던 의자에서 몸을 들썩이다가 다시 자리에 앉습니다.

작은 친구들이 서로의 의도를 읽어내려 찌푸린 미간과 허공을 가르는 손짓들이 언어보다 더 진실한 대화를 나누는 춤사위처럼 보였기 때문이지요.

선생님은 개입하지 않기로 결심합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 속에서, 스스로의 방식으로 세계를 탐험하고 있다는 사실을 존중하기 위해서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다음 활동이 이어져야 할 시간이었지만 작은 친구들의 놀이가 방해되지 않고 마무리되길 바라는 마음에 오늘은 지금의 이 시간을 더 연장하도록 합니다. 30분 후 아이들은 몸짓만으로 우주선을 발사하고 기지로 복귀하는 복잡한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합니다. 놀이가 끝난 뒤, 아이들은 크게 웃으며 서로의 몸짓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자랑스럽게 이야기합니다.

그들의 언어 없는 대화는 이상했지만, 동시에 완벽했습니다.

오늘 작은 친구들의 시간은 이상했지만 완벽했던 '진짜 놀이'였습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언어가 빠르게 성장하는 과정에 있지만, 동시에 언어 외의 다양한 소통 방식도 탐색하는 시기에 있습니다.

3-7세의 영유아기는 말로 표현하는 능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시기이지만, 몸짓·표정·눈빛 같은 비언어적 표현 역시 중요한 발달의 일부입니다.


지훈이가 “말하지 않고 몸으로만 이야기하기”라는 규칙을 제안한 순간은, 아이들이 언어를 넘어 새로운 소통의 가능성을 실험하는 장면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답답하고 엉뚱한 오해가 이어졌지만, 그 과정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몸짓을 해석하려 애쓰며 집중력과 인내를 기르고, 타인의 의도를 존중하려는 태도를 배웠습니다. 언어가 막힌 자리에서 몸짓으로만 대화하는 경험은 아이들에게 자기 조절력을 요구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아내고, 대신 상대의 움직임을 기다리며 이해하려는 순간, 아이들은 충동을 다스리는 힘을 키워갑니다. 이는 단순한 놀이의 규칙을 넘어 이후 학습 상황이나 또래 관계 속에서 갈등을 조율하고 협력하는 데 필요한 사회적 기술로 이어집니다.


또한 언어 없는 대화 속에서 아이들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법을 배웁니다.

몸짓이 매끄럽지 않아도 존중받는 경험은 표현한 아이에게 자신감과 안정감을 주고, 해석하는 아이에게는

공감과 배려의 힘을 길러줍니다.


결국 오늘의 놀이 속 기다림은 단순히 시간을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서로의 존재를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는 과정이었습니다.

기다림은 존중이고, 기다림은 배려이며, 기다림은 함께 살아가는 힘을 키우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깊은 교육입니다. 언어 없는 대화 속에서 아이들이 서로를 기다려 준 순간, 작은 공동체는 더욱 단단해졌고, 그 안에서

성장과 발달은 조용히 그러나 깊게 이루어졌습니다.



함께 생각해 볼까요?


ㅣ 선생님의 개입을 멈추는 순간,

아이들은 어떤 힘을 스스로 길러내고 있을까요?


ㅣ 아이들이 스스로 만든 규칙이 어른의 시선에는

비효율적으로 보일 때,

우리는 어떤 기다림을 선택할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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