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비의 유용성
사치는 자원의 낭비를 의미한다. 고대 건축물들을 보자. 멋진 조각과 문양, 장식들이 우리를 감탄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런 화려함이 없어도 건물은 제 기능을 다 할 수 있다. 어쩌면 건축에 소요된 노동과 자원의 절반 이상이 미적 기준을 충족시키기 위해 쓰였을지도 모른다. 신부의 웨딩드레스도 마찬가지다. 신부가 지나간지 한참 뒤에도 웨딩드레스의 긴 끝자락은 하객들과 계속 인사를 주고받는다.
현대는 물질주의와 자본주의의 시대다. 현대의 대표적 사치는 바로 돈 낭비다. 명품시계라고 해서 시간이 더 정확한 것도 아닌데, 관리하는 데 더 많은 비용과 노력이 드는 기계식 무브먼트를 유지하기 위해 돈을 낭비한다. 싸구려 나일론도 ‘프라다’를 입으면 ‘프라다’ 원단이 되어 값이 치솟는다. 몇몇 수입차종은 최고 속도를 낼 기회가 1년에 한 번 될까 말까 하지만 빠르다는 이유로 드림카가 되고, 포장도로를 벗어날 일이 없는 도시에서 초고가 오프로드 자동차가 가장 많이 팔린다. 사치는 자원을 마구 낭비함으로써 이렇게 낭비를 해도 문제가 없을 만큼 여유롭다는 것을 과시하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궁극의 사치는 무엇일까? 아무리 비싼 명품을 수집하고 집을 화려하게 치장해도 그것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바로 자기 과시다. 그런데 이렇게 목적이 분명한 것은 궁극의 사치라고 볼 수 없다. ‘묻지마 살인’이 더 무섭고 잔혹한 것처럼, 진정한 낭비라면 돈을 쓰는 데 합당한 이유가 있어서는 안 된다. 최소한 돈을 쓰는 자신에게는 직접적인 혜택이 없어야 한다. 따라서 궁극의 사치를 경험하려면 자신과 전혀 관계없는 이들에게 돈을 쓰면 된다. 그렇다고 길거리에서 마구 돈을 뿌려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이런 돈을 주우면 절도가 된다) 궁극의 사치를 하고 싶다면 기부를 하면 된다. 자기와는 일생 만날 일도 없고 어디 있는지도 모를 그런 이들에게 돈을 보내는 것이다. 지인보다는 모르는 이들에게, 우리나라보다는 다른 나라에, 아니면 차라리 북극곰에게 말이다. 돈을 받는 이가 나의 관계가 멀수록 궁극의 사치가 완성된다. 그리고 과시가 목적이 아니므로 기부 사실을 절대 알려서는 안 된다. (이런 측면에서 보자면 나는 아직도 여러 의미에서 사치와는 거리가 매우 멀다.) 기부한 이들이 환하게 웃고 다니는 이유는 아마도 궁극의 사치를 경험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돈이 없는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는 무엇일까? 바로 돈 버는 데 써야 할 시간과 에너지를 다른 곳에 낭비하는 것이다. 많은 예술가들이 돈도 안 되는 그림을 그리고 시를 쓰느라 인생을 허비한다. 이들이 배고픔에도 예술을 멈출 수 없는 것은, 궁극의 사치를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대중문화는 자본주의의 효율성에 매우 충실하다. 즐기는 데 에너지와 비용이 많이 들지 않고 다시 일터로 나갈 수 있도록 휴식을 주기 때문이다. 진정한 사치는 돈 버는 일에 방해가 되어야 한다. 그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문학과 철학, 예술과 같은 소위 인문학이다. 이런 것들은 몸과 마음을 쉬게 하는데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에 집중하려면 상당량의 에너지를 소비해야 한다. 며칠 동안 우울감에 시달릴 수도 있고, 멍하거나 답답한 마음이 들 수도 있다. 심하면 일이 손에 잡히지 않고, 일해야 할 시간에 쓸데없이 일의 가치 따위를 고민하게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궁극의 사치다. 바로 옛날 지배계급들이 독점적으로 누리던 것들이며, 선비들이 당장 먹을 곡식이 없어도 행복했던 이유다.
문학평론가 김현은 문학은 배고픈 사람 하나 구하지 못하지만, 쓸모없기 때문에 인간을 억압하지 않는다고 했다. 유용한 것들은 대체로 인간을 소외시킨다. ‘야인시대’의 주먹패들을 보면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다. 좋은 구역을 차지하려면 힘 좋은 이들을 한 명이라도 더 모아서 떼로 몰려가 기존 건달들을 몰아내면 그만이다. 그런데 그들은 우두머리끼리 일대일로 주먹다짐을 해서 승패를 갈랐다. 자본주의는 눈에 보이는 비효율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주먹세계의 낭만과 비효율은 생산성이 월등한 칼잡이들이 등장하면서 바로 사라졌다. 이런 효율성의 극단에 있는 것이 바로 전쟁이다. 적을 섬멸하고 승리를 쟁취한다는 뚜렷한 목적 앞에 모든 것이 희생된다. 승리를 위해서는 인간도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 된다. 전쟁 중에는 승리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거나 혹은 해를 끼치지만 않으면, 인권이 유린되고 학살이 자행되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다.
직장이나 사업, 자녀교육, 가사 이런 것들 때문에 많은 이들이 힘들어한다. 그런데 일을 하는 것도, 아이를 걱정하는 것도, 집안일을 하는 것도 궁극적으로는 모두 ‘나’를 위해서 하는 일이다. 그렇지만 막상 그것들을 하다 보면 ‘나’는 온데간데없고 일만 남기 때문에 괴로운 것이다. 인생에 대해 제대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데, 인생이 아무 문제 없이 굴러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지금 우리에게는 사치가 필요하다.
과학과 공학에서는 순수과학이 사치의 영역이다. 당장의 끼니를 걱정하고 매일 수 킬로미터를 걸어 물을 길어와야 하는 아이는 가만히 앉아서 수학 문제를 풀 수 없다. 그래서 순수과학은 여유 있는 선진국들이 주도하게 된다. 그런데 현실과 공학에서 어려운 문제들의 해결책은 대부분 순수과학에서 나온다. 즉 쓸모없는 것이 진정 쓸모 있는 것이다. 당신이 힘들고 답답한 이유는 무엇일까? 명확한 목적을 지닌, 효율적이고 생산적인 것들에만 매달린다면 오히려 그 해답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인생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쓸모없는 것에 당신의 자원과 에너지를 낭비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궁극의 사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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