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의 애착이 평생을 좌우한다!
영국의 정신분석가이자 정신과 의사인 존 볼비(John Bowlby, 1907~1990)는 초기의 애착형성이 인간 본성의 가장 중요한 기본이 되고, 애착형성이 잘 되지 않으면 아동기뿐 아니라 성인기의 여러 가지 정신질환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애착이론을 정립했다.
생애 초기에 어머니의 적절한 돌봄 행동에 의해서 아이가 갖게 되는 안정적 애착(attachment)이 자신과 타인,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내적인 작동모델을 만드는 데 가장 중요한 토대가 된다는 이론을 세웠다. 이때 만들어진 모델이 성인이 된 다음에도 그 사람의 대인관계에 대한 생각, 느낌, 기대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 [네이버 지식백과] 존 볼비의 애착이론 (정신의학의 탄생, 2016.01.15, 하지현)
엄마와 애착을 형성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아이의 울음에는 즉각 반응해야 한다고 했다.
기대와는 전혀 다르게 아이는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댔다. 기저귀 갈아달라고 울고, 배고프다고 울고, 심심하다고 울고, 졸리다고 울고, 아프다고 울었다.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울음도 많았다. 모든 필요를 다 충족해 줬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순전히 내 생각일 뿐이었다.
잠시 소변을 보기 위해 화장실을 가는 것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아이가 울면 즉각 반응하지 못할까 봐 불안했다. 평생을 좌우한다는 애착 형성이 잘못될까 봐 애가 탔다.
한 달, 두 달, 시간이 흐르면서 아이와 지내는 게 적응이 되다 보니 아이의 울음에 대한 예민한 마음이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아이가 울면 기저귀를 확인하고, 수유 텀을 확인하고, 졸리는 시간인지 확인하되 알고 있는 모든 방법이 아니라면 안아서 걸으면 울음이 쉬이 멈추었다.
문제는 아이가 10개월 차에 접어들 때 발생했다. 우리 부부에게 둘째가 찾아왔다. 동생이 생긴 걸 아는지 아이는 더욱 내게 달라붙으며 안아달라 떼썼다. 불룩한 배 위로 첫째 아이를 자주 안았다.
18개월 차이 연년생이다. 지랄하는 나이, 생후 18개월. 어떤 사람은 '18'이 욕이 되는 이유를 18개월 아이의 행동에서 유래한 거라고 말했다. 예민한 기질을 타고난 첫째 아이는 그렇게 생후 18개월에 언니가 되었다.
둘째를 낳고 조리원에 들어와 있던 나는 첫째 아이 때보다 훨씬 여유가 있었지만, 몸의 회복은 더뎠다. 첫째 아이 떼는 회음부 방석을 쓰지 않아도 편안하게 앉을 수 있었는데 둘째 출산 직후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아이의 울음에 좀 적응이 됐다고 생각했지만 나의 큰 착각이었다. 둘째를 수유하면서 첫째 아이를 쫓아다닐 수 없었다. 연년생 엄마는 처음이라 혼란스러웠다. 첫째의 울음에도, 둘째의 울음에도 즉각 반응하기에는 힘이 부쳤다.
정부의 아이 돌봄 서비스를 신청해서 돌봄 선생님을 집으로 모셨지만 2주 정도 지나자 힘이 드셨는지 그만두셨다. 연년생 자매의 울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우리 부부는 결단을 내린다. 집에서 370km 떨어져 있는 경남 창원 시부모님 댁에 들어가서 살기로. 아이 둘의 필요를 즉각 채워주지 못할까 봐 안달이 났던 나머지 멀리 시부모님 댁으로 쳐들어가게 되었다.
남편은 집에서 회사를 다니고, 평일에 아이 둘과 나는 창원에서 지내다가 주말마다 남편이 내려오기로 했다. 전라도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던 내가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창원에 내려가 살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주변에서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내며 잘 생각해 보라고 말렸다. 시부모님과 함께 사는 건 내 성격이라면 잘 맞추며 살아가리라 생각했다. 또 거의 집에서만 틀어박혀 지낼 것으로 예상되었기에 아이들이 안전하게만 지낼 수 있다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시어머니는 아침에 눈을 뜨고부터 밤에 눈을 감을 때까지 온통 손녀들을 위해 동분서주 일하셨다. 첫째 아이를 위해 손수 이유식을 지어주시고, 모유 수유 중인 며느리를 위해 매일 삼시세끼 밥상을 차리시고, 빠른 속도로 쌓여가는 빨랫감을 처리하셨다.
그에 비해 내가 하는 일이라곤 아이들 뒤치다꺼리뿐이었다. 하루 24시간이 너무 더디게 흘러갔다. 집안일도 내 몫이 아니어서 몸이 편한 듯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다. 아이가 울까 봐 샤워하러 욕실로 들어가는 것도 불안했다.
까다로운 첫째는 여전히 밤에도 낮에도 잠을 잘 못 이뤘다. 덜 민감한 둘째지만 언니의 꽥꽥거림에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첫째가 낮잠을 한 번 자고 둘째는 수시로 자야 하는 신생아인데 서로의 잠을 방해했다. 잠이 부족한 아이들은 민감했다. 나도 덩달아 날카로워졌다.
그렇게 남편이 오는 주말만을 손꼽아 기다렸다. 매주 어디로 놀러 갈지 검색했다. 내가 유일하게 콧바람을 쐴 수 있는 날이었기에 필사적으로 밖으로 나갔다. 한 주 한 주 지날수록 힘이 부쳤다. 시부모님은 내게 너무 잘해 주시지만 그것과 별개로 난 힘이 들었다. 내 시간도 없고, 내 공간도 없고,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일도 제한적이었다.
멀리 시댁에서 도움을 받겠다고 한 것은 나의 선택이었다. 내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힘들다고도 제대로 얘기하지 못했다. 하지만 내 마음은 멍들어가고 있었다.
아이의 울음에 즉각 반응하고 싶었을 뿐인데 정신을 차려보니 시부모님 댁이었던 것이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나는 누구인지 혼란스러웠다. 증발하고 싶었다.
아이들이 조금 울더라도 천천히 반응해 줘도 충분하다고, 아이들의 정서에는 큰 영향이 없다고 누군가 얘기해 줬으면 어땠을까.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이 아닌 내가 그렇게 인정해 주고 격려해 줬으면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