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지정해 준 내 자리. 한동안은 좋았다.
힘듦을 자처한 육아를 2년 9개월간 한 이후여서일까? 앉을 수 있어서 좋았다. 업무시간에 앉아 있을 수 있고, 점심도 앉아서 먹을 수 있고, 점심 먹은 후 카페에 가서도 앉아서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아이가 다칠까 봐 조심스러웠던 물건도 다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머그잔에 뜨거운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책상 어디에 두어도 나만 조심하면 됐다. 끝이 뾰족한 샤프, 칼날이 들어있는 커터칼이 책상 위에 돌아다녀도 괜찮았다.
회사로 복귀한 지 몇 주나 지났을까? 이런 소소한 일들이 새롭게 다가오지 않았다. 사무실 내 자리에 누군가가 함부로 앉지는 않지만 누군가는 업무 협의를 하겠다고 불쑥 찾아오기도 한다. 누군가는 상사에게 보고하고 들어가는 길에 잠시 들러 인사하기도 한다. 아직 익숙하지도 않은 업무지만 누군가는 전화로 물어보기도 하고, 메신저로 물어오기도 한다.
옆 테이블에서는 한창 회의 중인데 협의인지 협박인지 모르는 말들이 오간다. 앞 파티션에 앉은 직장동료는 통화 목소리가 점점 격앙되더니 수화기를 끊고 나서의 한숨이 깊다. 종종 무거워지는 이 공기에 내 기분도 함께 무거워진다.
나만의 아지트가 필요했다. 일반적으로 아지트는 사람들이 자주 어울려 모이는 장소를 뜻하지만, 나만의 아지트는 복수의 사람들이 아닌 나 자신이다. 내 아지트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는 곳이기를 바랐다. 혼자서 멍 때려도 괜찮은 곳으로 찾게 되었다.
제일 먼저 생각난 곳은 카페였다. 집과 회사 동선 상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어야 했다. 회사 근처 카페에서 출근하기 전에 30분 정도 시간을 보내다가 회사에 들어가기로 정했다. 수많은 카페 중에서 회사 사람들이 다니지 않는 카페를 찾아야 했다.
지하철 역에서 회사로 가는 길의 모든 카페는 제외했다. 커피를 테이크아웃하러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면 인사해야 하니까. 그렇다고 원래 다니던 내 동선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출근 전 1분은 매우 소중하니까.
버스에서 내려 회사까지 가는 거리는 도보로 4분 정도인데 그중에서 골라야 했다. 답은 의외로 쉽게 나왔다. 정류장 바로 앞에 있는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가 적당했다. 선택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입구에서 기역(ㄱ) 자로 꺾여서 테이블이 보이지 않는 자리가 있었다. 회사 사람들과 마주치기가 더 어려운 곳이었다.
테이블에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만 올려두고 가만히 있어도 힐링이 되었다. 책을 조금 읽기도 하고, 다이어리를 펼쳐서 끄적이며 사부작거리기도 했다.
집에서 가까운 거리의 아지트도 하나 필요했다. 난 어느 공간에서 기분이 좋았는지 떠올렸다. 아파트 단지 내에 있는 산책길이 불현듯 생각났다. 아파트 단지를 둘러싼 인공잔디 길인데 나무와 어우러져서 제법 둘레길 느낌을 낸다.
이른 아침, 후드티를 입고 모자를 뒤집어쓰고 맞는 차가운 공기가 상쾌했다. 유현준 교수의 책 '어디서 살 것인가'에서 래퍼들이 후드티를 입는 이유는 사적공간을 가지려는 행위라고 했다. 나도 그런 사적 공간을 가지려고 그랬을까? 자연스럽게 손이 후드티로 향했다.
아파트 곳곳에 심긴 풀과 나무들은 계절의 변화를 고스란히 전해주었다. 걷는 것도 좋았지만 잠시 멈춰 서서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큰 만족감을 주었다. 특히 윗몸일으키기 운동기구가 좋았다. 모자를 뒤집어쓴 채로 그곳에 누워서 나무와 아파트가 배경인 하늘을 바라보는 것도 나름의 묘미가 있었다.
또 다른 집 근처 아지트를 찾았다. 바로 도서관이다. 책을 많이 빌려야 하는 상황이 아니라면 걸어서 간다. 15분 정도 걸리지만 책을 만나러 가는 발걸음은 가볍다.
도서관에는 책이 촘촘하게 가득 쌓여있다. 원하는 책을 검색해서 찾아보고 빌린다. 이곳에 오는 사람들은 서로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책을 고르고 조심히 책장을 넘긴다.
창문 쪽에는 책상이 있다. 여러 권의 책을 쌓아두고 읽는 사람도 있고, 노트북으로 강의를 들으며 메모하는 사람도 있고, 자격증 시험공부를 하는지 두꺼운 책을 펼쳐두고 집중해서 읽는 사람도 있다.
나도 이 무리들 속에서 책을 쌓아두고 읽고 싶지만 여건 상 쉽지는 않다. 욕심껏 책을 빌려서 반납할 때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배우고 싶은 게 있을 때 언제든 달려가 책을 꺼내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
누구의 시선도 신경 쓰지 않으며 앉아 있는 카페, 상쾌한 바람을 맞으며 걷는 아파트 산책길, 책으로 둘러싸여 있는 도서관은 나만의 아지트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낸다.
동네를 한 바퀴 돌며 산책하면서도 둘러본다. 또 다른 아지트가 될만한 곳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