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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배즐성 Dec 21. 2023

맞벌이인 거 티 내지 않으려고

"아이들이 놀이터에서 노는 거 보면, 티가 나. 누구 부모가 맞벌이고 누가 아닌지."


한 전업주부 엄마의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아이가 놀이터에서 놀면서 말하고 행동하는 거 보면 부모가 바빠서 잘 챙기질 못하는 게 티가 난다는 얘기였다.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게 티가 나는구나. 티를 좀 안 내고 싶다. 티를 안 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하긴 한 걸까?'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어떻게든 티를 안 내보리라 다짐하면서.




두 아이가 다녔던 어린이집은 보통의 유치원생 나이인 취학 전 5세~7세 아이들이 다니는 곳이다. 맞벌이 부모를 위해 밤 9시 30분까지 보육을 해줄 수 있는 어마어마한 곳이다. 그래서 아파트 단지 내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아파트에 살고 있는 아이도 이곳에 다니고 있었다. 우리도 어린이집에 맡기면 돌봄선생님을 모시지 않아도 되고, 저녁을 미리 준비해 둘 필요도 없고, 바쁜 아침에 정리까지 하지 않아도 됐었다. 무엇보다도 비용을 훨씬 절감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따스한 햇살 아래서 친구들과 놀이터에서 놀게 해주고 싶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어린이집 안에서만 생활하는 게 너무 답답할 것 같았다. 어쩌면 맞벌이 부부라는 것을 티 내지 않으려고 결정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여느 아이들처럼 5시에 우르르 나와서 어린이집 앞 놀이터에서 같이 좀 놀다가 집에 들어가 저녁을 먹는 코스를 선택했다. 돌봄선생님이 계신 덕분에 모든 게 가능했다.




어린이집에서는 특별활동들이 많았다. 매달 생일잔치가 열렸고, 생일자들에게 줄 선물들도 준비해야 했다. 매달 어떤 선물을 준비할지 아이템을 정하고, 인터넷으로 주문하고, 일일이 포장을 했다. 매주 독서 활동도 있어서 책을 읽고 기억나는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다든지, 책에 나왔던 단어들을 써본다든지 하는 등의 활동지를 작성해서 매주 월요일에 제출해야 했다. 매주 일요일 저녁이면 활동지를 했는지 체크하고 하지 않았다면 채근해서라도 완성시켜야 했다. 그 외에도 어린이집에서 공지해 주는 것들을 꼼꼼하게 읽어보고 놓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썼다.


실내에서 신는 실내화도 매주 열심히 빨았다. 자매가 같이 어린이집에 다니니까 두 켤레였다. 금요일이면 실내화 주머니에서 실내화를 꺼내 욕실에서 가장 잘 보이는 세면대 위쪽에 올려두었다. 그래야 잊지 않고 손빨래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실내화가 더러워진 채로 다니면 부모가 바쁜 맞벌이라는 사실을 온 동네방네 소문내는 것 같이 느껴졌기 때문에 더욱 열심이었다. 실내화 따위로 티 내고 싶지 않았다.




어린이집에서 부모의 참여를 요청하는 일들도 꽤 많았다. 체험활동하러 나갈 때 엄마들을 도우미로 몇 명을 모집해서 가기도 하고, 김장이나 떡 만들기 등 요리 체험수업을 할 때도 도움을 요청하셨다. 엄마들이 얼마나 열심인지 공지를 올리자마자 본인들이 하겠다고 빠르게 손을 들어서 순식간에 마감이 됐다.


아이가 이렇게 생각할 것 같았다. '다른 엄마는 자주 어린이집에 오는데 우리 엄마는 회사 다녀서 오기 힘들어.' 하며 아쉬워하고 서운해하며 의기소침해져 있을 것 같았다. 순전히 내 상상으로만. 그래서 내가 아플 때 휴가는 못 내더라도 어린이집 모든 행사에는 악착같이 참여하겠다고 손을 들고 아낀 휴가를 썼다. 부모가 모두 참석하는 행사도 종종 있었는데, 남편에게도 그날만은 꼭 함께 할 수 있도록 스케줄을 조정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었다. 육아휴직을 하고 전업주부가 되어보니 참 별거 아니었다는 생각이 든다. 맞벌이인 게 티가 좀 나면 어떤가? 큰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닌데 난 이를 붙들고 어떻게든 티가 안 나게 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썼다. 


재미있는 점은 전업주부가 되고 나서 더더욱 안 챙긴다는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은 꼭 빨았던 실내화를 지금은 더럽다고 얘기해야 빨아준다. 학교 행사? 웬만하면 참석하지 않는다. 하교할 때? 춥다고 안 나가고 다른 일 하느라 안 나가다 보니 이제 내가 안 나가는 게 자연스러워졌다. 맞벌이가 뭐 어때서? 아등바등하지 않아도 아이들은 알아서 잘만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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