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나답게 살아도 괜찮다는 증거

by 이옥겸

비슷한 일을 하다 보니 자주 마주치던 사람이 있었다. 행사장이나 모임에서 얼굴을 보면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가끔 밥을 먹으며 일 이야기를 나누던 사이였다.

그런데 몇 달 전, 어떤 프로그램 진행 방식을 두고 의견이 엇갈린 적이 있었다. 그때는 서로 자기 생각을 조금씩 이야기했을 뿐인데, 대화가 끝나고 나니 묘하게 마음이 불편했다. 딱히 언성을 높인 것도 아니고, 서로를 비난한 것도 아니었지만, 뭔가 서로의 방식이 다르다는 걸 확인한 느낌이었다.

그 뒤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연락이 뜸해졌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행사장에서 우연히 마주칠까 봐 슬쩍 피하게 되는 나를 발견했다. 서로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어색함. 그렇게 한두 달이 흘렀다.

사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다. 휴대폰을 들고 이름을 눌렀다가, 괜히 어색해질까 봐 다시 내려놓기를 반복했다. '지금 전화하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내가 먼저 연락하는 게 괜히 의미를 크게 만드는 건 아닐까.'

그렇게 몇 번을 포기하고 난 어느 날 오후, SNS를 보다가 우연히 그 사람이 올린 근황 사진을 봤다.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는 내용이었다. 평범한 일상 공유였지만, 그 사진을 보는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아무 일 없던 것처럼 지나가는 게 맞을까?'

그날은 이유 없이 마음이 조금 가벼웠다. 그래서인지 망설임 끝에 결국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렸다. 받지 않으면 어쩌나 싶은 순간, 전화가 연결됐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조금 의아한 것 같았다. 당연했다. 두 달 넘게 연락 없다가 갑자기 전화를 한 거니까.

"아, 안녕하세요. 잘 지내시죠?"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오랜만이네요."

잠깐의 침묵. 서로 다음 말을 찾고 있는 게 느껴졌다.

"아… 그냥 요새 어떻게 지내시나 싶어서요. SNS에서 새 작업 시작하신 거 봤는데, 잘 되고 계신가 해서."

"아, 그거요? 이번에 새로운 주제로 준비하는 게 있어서… 조금 정신없긴 한데 재미있어요."

목소리가 조금씩 풀리는 게 느껴졌다. 나도 어깨에 힘이 빠졌다.

"요즘 저도 이것저것 준비하는 게 있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고요."

"그러게요. 저도 그래요. 처음엔 쉬울 줄 알았는데 막상 해보니…"

그렇게 몇 마디를 주고받다 보니, 그동안 쌓였던 거리감이 조금씩 풀렸다. 오히려 연락이 뜸했던 시간이 서로에게 숨을 고를 여유가 되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졌고, 이야기는 예전에 함께 나눴던 고민들로까지 번졌다.

"그때 그 얘기 있잖아요, 진행 방식 관련해서. 저도 나중에 생각해보니까 제가 너무 제 입장만 얘기한 것 같더라고요."

"아니에요, 저도 그래요. 그냥 서로 방식이 다른 거였던 것 같아요. 요즘 생각해보니 그것도 괜찮은 거 같고."

그 말에 가슴 한쪽이 스르륵 풀렸다.

"조만간 얼굴 한 번 보죠. 밥이나 한번 먹어요."

"그러죠. 연락 주세요."

전화를 끊고 한참 동안 괜히 휴대폰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이 한결 가벼워진 기분이었다.

며칠 뒤, 그 사람한테서 먼저 메시지가 왔다. "다음 주 괜찮으세요?" 우리는 오랜만에 만나 밥을 먹었고, 그날 이후로는 예전처럼 자연스럽게 안부를 주고받게 됐다.

그제야 알았다. 우리가 멀어진 이유는 누군가의 잘못이 아니라, 서로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걸.

예전의 나는 먼저 다가가는 걸 약하다고 생각했다. 괜히 지는 것 같고, 마음이 더 있는 사람처럼 보일까 봐 두려웠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먼저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오히려 나를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날 나는 그저 먼저 손을 내밀었을 뿐인데, 관계도, 마음도 조금은 더 가벼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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