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HD, 우울증 환자가 '낙차감'을 겪던 날
이 시간부터는 수치심과의 싸움이다.
남들은 어떻게 저렇게 당당히 고개를 들고, 걷고, 웃을 수 있는 걸까? 낮에는 들지 않던 고민이 피어오르는 걸 보니 이건 수치심이다. 낙차감이다. 약기운이 뇌에서 싹 빠져나가는 게 느껴진다. 먹고살아보려 발버둥 치는 게 창피하다. 그러면서도 나 하나 제대로 먹여살리지도 못하는 것도 한심하다. 친구에게 건넸던 위로마저도 부끄럽게 느껴지는 저녁이다. 내가 뭐라고. 내가 뭐라고.
내가 뭘 한 거지?라는 생각이 맴돈다. 오늘의 모든 행적과 말들과 내가 보낸 눈빛, 화장실에서 바지 지퍼를 잘 잠궜는지까지 나노단위로 따져본다. 뭘 하긴 뭘 해, 넌 한 게 없지. 헛헛하다. 아니요. 이렇게 괴로울 만큼 전 잘못한 게 없어요. 정말? 오늘 먹은 샌드위치에 들어있던 햄이 떠오른다. 좁은 우리 안의 돼지들과 겹친다. 돼지 울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오늘 낮에 내가 만든 이야기에 퍽 흡족해했던 내 모습도 떠오른다. 그 얼굴에 커피를 뿌려버리고 싶다. 넌 아무것도 아니잖아. 왜 무엇인 척 해?
그렇지. 네가 만들어낸 글자들과 이미지와 또 무엇, 아무튼. 너가 만들어낸 모든 것들은 아무것도 아니노라. 다시 기어들어가라. 더 멀리 숨어 살아라. 이번엔 방문을 단단히 잠구고 절대로 나오지 말아라. 신경안정제처럼 핸드폰을 찾는다. 마음의 소리를 이렇게라도 꺼내본다. 이건 내가 아니다. 이 생각은 내가 아니다. 흘러갈 거다. 내가 아니다.
나도 내가 어이가 없다. 무엇엔가 홀렸던 건가. 어안이 벙벙하다.
홀렸다면, 지금일까? 아님 내가 사랑스럽게 보였던 때일까. 낙차감을 온몸으로 겪고 있다. 떨어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우습게도 몸은 버스 안이다. 울고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분명 급속도로 추락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이제 집에 가서 할 일은, 씻자. 그러고 나면 완전히 납작해진 상태로 침대에 들러붙겠지. 그때까지만 참자. 아, 깨달았다. 누구도 제대로 미워하지 못해 내가 미운거구나. 나를 따돌렸던 가해자들 역시 어렸다고, 나 역시 그때 동생을 괴롭힌 것을 떠올리며 미워하지 못했다. 그래서 학폭 가해자들을 비난하는 사람들 앞에 걔네들 대신 내 등을 떠밀어 화살이 꽂히고. 동물구조를 하면서도 육식을 하는 내 곁의 사람들을 미워할 수가 없어서 고기찬양을 하며 누구보다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나는 이도저도 아닌 인간이 되어버린 거겠지. 그러나 돌아오는 죄책감은 내 몫이다.
이도저도 아닌 주제에 죄책감은 떠안으려니 조금은 억울하다. 억울한 내가 가장 밉다. 넌 원래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예수도 아닌 부처도 아닌 주제에 누굴 미워할 용기도 없어서 선량한 척, 죄책감은 떠안기 싫더냐? 우습다 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