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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영운 Feb 04. 2023

버튼

가끔 나는 우리의 이마에 조그만 버튼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들어가며

이 글은 제가 브런치에 게시한 글 중 가장 정제되지 않은 글입니다.

독자가 아니라 작가인 제 자신을 위해 작성된 글이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에 가득한 생각들을 쏟아낸 후 공개된 장소에 게시하는 다소 무례한 에세이 혹은 일기입니다. 글을 계속 읽고자 하시는 분은 이 점을 양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본문

남의 다리가 부러진 것보다 내 손가락의 가시가 더 아픈 법이라고 한다.


우리는 누구나 아프리카에서는 여전히 아이들이 굶어 죽고 우크라이나에서는 시민들이 밤중에 폭격을 맞아 죽고 있으며 좀 더 가깝게는 서울역 앞에서 노숙인들이 밤마다 지옥 같은 추위와 허기에 고통받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또한 우리는 남들이 나보다 더 큰 고통을 겪는다는 것을 안다고 내 고통이 무뎌지지는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아이들이 굶어 죽는다고 먹기 싫은 반찬이 더 맛있어지는 것은 아니니까.


이건 꽤나 재미있는 발견으로 이어진다. 내가 과거에 큰 고통을 겪었다고 해서 현재의 내가 그보다 덜한 고통을 겪는 게 더 견딜 만 해지는 건 아닌 것 같다. 과거의 내가 겪은 큰 고통도 타인의 고통만큼이나 나와는 관련이 없는 사건이 되는 것이다.


하고 싶은 말은, 지금 내가 꽤나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과거에 더 고통스러웠던 시기가 몇 번 있었지만 그렇다고 현재의 고통이 누그러지지는 않는다. 이 고통은 궁핍이나 실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최근에 대단한 실패를 맞이한 것도 아니다. 나는 존재론적 허무주의와 마주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는 말이다. 남들은 배부른 소리라고 비난하겠지만 그 역시 이 고통을 줄여주진 못한다.


삶이 권태롭다고 느낀다. 지난 5년과 비슷한 삶이 계속 반복되다가 천천히 늙어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이기적 유전자'의 저자 리처드 도킨스는 우리 생물 종은 유전자를 번성시키기 위한 전달자에 불과하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는 나로서는 이 삶을 지속시킬 이유가 없는 셈이다.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우리는 반드시 살아가야 할 의무가 있다는 식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불쾌하다. 죽는 것보다 못한 삶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가끔 나는 우리의 이마에 조그만 버튼이 있다면 어떨까 생각한다. 살기를 그만두겠다고 결정하면 언제든 스스로 버튼을 누른다. 그러면 기계장치의 전원이 꺼지듯 고통 없이 조용히 삶을 마감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이마에 종료 버튼이 생긴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버튼을 누를까? 언제든 버튼을 눌러 삶을 종료할 수 있는 사람들의 행복도는 지금보다 높아지지 않을까?


그러니까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라 죽지 않을 이유 혹은 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섹스를 더 하는 신체적 쾌락에서도 큰 의미를 찾지 못하겠고, 삶을 바쳐서 장기적으로 이뤄내고 싶은 위대한 업적도 따로 없다. 이마의 버튼을 누르는 식으로 간단히 고민을 해결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형편이 좋지 못하다. 그냥 돈이 부족해서 그런 걸까? 더 많은 돈을 사용해서 더 큰 쾌락을 느끼면 삶의 충만감을 얻을 수 있는 걸까?


생각이 막혀 ChatGPT에게 한차례 질문을 던져봤다. '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다양한 철학적인 답변을 얻었다. 공리주의, 객관주의, 실존주의, 허무주의 등의 사조가 삶의 의미에 대해서 다양한 이유를 제시한다. 하나의 대해서 서로 다른 다양한 답변이 존재한다는 것만 봐도 이 질문이 그동안 인류를 꽤나 괴롭혀 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중에서 허무주의는 인간의 삶에는 정해진 목적이나 이유는 없으며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스스로의 존재 목적을 설정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존재라고 설명한다. 사실 네 가지 사조 모두 제대로 된 답변은 못하고 변명하듯 내놓은 땜질식 논리였지만 그나마 허무주의자들의 설명이 가장 동의할만한 것 같다.


그렇다면 나는 이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아보려는 노력을 할까 한다. 여행을 가는 등 좀 더 쾌락을 추구해보려고도 한다. 그와 동시에 삶을 좀 더 단순하고 간결하게 정돈해서 언제든 버튼을 누르기 편한 상태로 만드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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