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이트락(White Rock), BC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불어오던 어느 여름의 느지막한 시간. 도시와 달리 사방으로 늘어난 아름다운 하늘과 그림 같은 구름, 철길을 따라 끝없이 이어진 바다를 따라 산책로를 주욱 걸었다. 오른쪽 시선에 수평선과 널찍한 하늘을 두고 근 5킬로미터를 죽 걷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만족감이 가득 불어왔다.
이 아름다운 휴양지를 ‘화이트락(White Rock)’이라는 이름으로 명명케 한 주인공이 저 멀리 보인다. 흰 돌은 생각보다 볼품없이, 산책로 끝 쪽에 무심하게 툭 놓여 있었다. 그저 돌에 색칠해 둔 것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볼품없는 저 돌이 만에 하나라도 사라진다면, 어디서 그저 다른 돌 하나를 가져와서 흰색으로 색칠해 두려나?
실없는 생각을 하며 브리티시컬럼비아주(BC주, 캐나다 최서단 주, 대한민국의 9배 크기, 밴쿠버, 버나비, 코퀴틀럼, 랭리 등을 다 포함하고 있음)에서 가장 길다는 잔교를 따라 걸었다.
산책로에서 잔교까지 걸어오는 길은 오른쪽 시선만 바다로 가득 찼다면, 잔교에서는 나의 모든 시선이 하늘빛으로 가득해졌다. 아래쪽은 바닷물, 위쪽엔 하늘. 수줍은 듯 적당히 푸른 하늘빛 하늘을 흰 구름이 촘촘하게, 끝없이 수놓았다. 우연히 생긴 하나의 곡선은 그 아름다움을 배가시켜 주었다. 휴양지는 휴양지인지, 많은 인종이 상기된 목소리로 함께 걸었다.
잔교를 걷다 보니 잔교의 나무 한쪽 끝에 하나씩 누군가의 이름이 새겨진 것을 보았다. 세상에서 사라진 사람을 추모하며 일정 금액을 내고 이름을 남긴 것 같았다. 잊히지 않기 위해, 업적을 남기기 위해 아무리 발버둥 쳐도, 심지어 큰 업적을 남기더라도 사람들의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기억해 주고 심지어 나를 기리기 위해 아름다운 공간에 나의 이름을 남겨준다면 얼마나 기쁠까, 그거면 족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얼마면 될까?
철길을 따라 만들어진 산책로가 긴 만큼 철길은 가늠할 수 없게 죽 이어졌다. 잔교 끝까지 걷고 다시 산책로로 돌아오는 길에 기차가 산책로와 상가로 가는 길을 막는 것을 보았다. 지평선 끝, 내 시야 오른쪽 끝에서 콩알만 하게 보이던 열차가 이젠 제법 큰 크기가 되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열차 칸을 세는 게 불가능할 정도로 컨테이너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기차에 가로막혀 사람들은 꽤 긴 시간 기다렸다.
귀여운 캐나다구스와 함께 기다리니 추억이 되었다. 기차를 기다리며 뒤를 돌아봤다. 놓쳤던 아름다운 풍경도 기차 덕에 담았다.
해변과 산책로를 지나 반대로 죽 걸어가면 이제 산책로와 평행하게 가게들이 푸짐하다. 예전 같으면 그저 지나가다가 끌리는 곳에 들어갔을 텐데, 이놈의 기술 발전. 난 가게를 구경하는 대신 휴대전화에 눈을 한껏 갖다 대고 있었다. 구글 평점을 하나하나 찾아보면서.
개중에 평점이 좋은 가게를 하나 찍고 걸어갔는데, 어른들과 같이 놀러 갔는데 식당이 아니라 펍에 가까운 곳이어서 주 식사 메뉴가 없을까 망설여졌다. 휴대전화만 믿고 이런 장소로 모두를 데리고 온 게 좀 미안해졌다. 하지만 가게 앞에서 지금이 ‘해피 아워'이며 괜찮은 메뉴가 있을 것 같아 들어가 보기로 했다. 한잔하기에도 참 좋은 풍경이었으므로.
캐나다 사람들은 물만 보이면 뛰어들고, 햇빛을 보면 햇빛으로 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나는 그와 정 반대. 사람들이 가득한 파티오를 고사하고 한적한 가게 안으로 들어왔다. 음, 이 햇빛 없는 어두움, 나에게 딱 맞다.
어쩐지 가게의 서버들은 모두 여자분들이었고 모두 멋진 분들이었다. 우리 테이블을 맡은 분도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인사를 하고 주문을 받았다. 해피 아워나 메뉴에 대해 질문을 많이 했는데 친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해피아워가 지나 추가 주문을 한 것도 가게에 말해서 해피아워 가격으로 처리해 주기도 했다.
주류를 주로 파는 곳이라 큰 기대를 안 했는데, 피시 앤 칩스는 영국에서 먹어 본 것보다 훨씬 맛있어서 놀랐고, 푸틴은 한국에서 먹어본 것과 그레이비의 맛이 완전히 달라서 놀랐다(하지만 캐나다인 세 분은 두 메뉴 다 그저 그렇다,라는 반응).
클램차우더는 좀 짰지만, 크림 베이스에 진한 조개칼국수에서 나는 감칠맛이 함께 느껴져 낯설면서도 익숙하고 구수했다. 이제 당연히 기대할 수 없는 친절함과 미소, 호의, 그리고 짭짤하고 맛있는 음식. 화이트락을 끝까지 광활하고 아름답고 평안하면서도 따뜻하고 상쾌한 곳으로 기억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날은 사실 새벽에서야 잠이 들어 늦게 일어나서 무언가 특별한 걸 하긴 어려울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차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 이렇게 반대편에 미국이 보이는 근사한 휴양지까지 오다니(물론 도시 근처에 이런 곳이 있는 것도 놀랐다!). 많이 와 보셨을 곳이고 또 귀찮으실 수 있는데 오늘로써 4일째 캐나다의 곳곳을 충실하게 보여주시는 삼촌과 숙모께도 감사한 마음이 많이 들었다. 연고가 있는 곳에 여행을 가 본 적이 없어 처음 겪는 상황. 그리고 한껏 의존적으로 변해버린 나의 모습. 낯설고 죄송하고 감사하고 신기하고 죄송하고 편안했다. 화이트락이 시원하고 좋았던 만큼 좋은 분들이 계셔서 한국에 있는 지금 나에게 캐나다의 기억이 더 아름다운 것 같다. 내 마음속에 잔교가 있다면, 많은 추억은 왼쪽 끝에 차곡차곡 써 두고, 오른쪽 끝에는 고마운 사람들을 남겨 두고 싶다. 그리고 나도 누군가의 잔교와 추억에 이름을 남기는 사람이 되고 싶다.
추신: 사람이 바글바글한 가게에서 줄을 서서, 한껏 외국 느낌 나는 색깔의 아이스크림을 골라 먹었다. 한국에서 먹던 구슬 아이스크림 맛과 똑같아서 골랐는데 그 아이스크림이랑 맛도 똑같았다.
추신 2: 00의 정답은?
출제의도: 온기, 친절, 호의
유사정답: 흰 돌, 구름, 바다, 열차, 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