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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그루 Oct 15. 2024

비 오는 날 내비게이션 없이 공원 찾아 생긴 일

바넷 마린 공원, 버나비, BC, 캐나다


 무언가 해야만 할 것 같은 압박을 스스로 느끼는 날이 가끔 있다. 

 이를테면 날씨가 너무 좋은 주말이라든지, 

 큰맘 먹고 캐나다 여행을 왔다든지.



 그때 난 적극적으로 어딘가 가자고 하고 싶은 곳은 없고 의욕은 없지만 이대로 있어서는 안 된다는 은은한 불안감이 감도는 상태가 된다. 수동공격적 외출 욕구라 할까. 나는 사실 귀찮지만 하루가 소중하고 아까우니 옆사람이 내 몫까지 더 활력을 내서 끝내주는 그날의 일정을 제시해 주길 바라곤 하는 이기적 마음상태.



 하지만 고개를 돌려 보면 나랑 똑같은 사람만 보여 아쉬움 반, 안심 반으로 다시 뒹굴거리곤 한다.

한가롭게 삼촌댁 와인 구경 중 - BC주에는 '킬로나'라는 유명한 와이너리 마을도 있어요


마치 두 마리 애벌레처럼 한껏 꾸물거리던 우리를 삼촌과 숙모께서

더 부지런하고 활력 있게 목적지를 제시해 주시며 바깥세상으로 떠밀어주셨다.





 오늘의 목적지는 ‘로키 포인트 공원'! 

 저녁엔 식사 약속이 있으므로 간단히 여유를 즐기고 오기로 했다. 물론 난 어딘지도 모르고 일단 출발했다. 그는 꽤 많이 가 봤던 곳이라고 했다.







 주차장 밖을 나오자 포슬포슬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아주 세차게 오진 않는데 전반적으로 길과 주변에 흰 안개가 비치는 그런 날씨. 그는 내비게이션이 필요 없다 했다. 난 필요할 것 같다고 하였으나 ‘나 캐나다 사람이야', '나 여기 다 알아'라는 그의 말을 믿기로 했다. 

 하지만 그의 다음 말은 날 불안하게 했다.

“너무 오래 걸리는데…?”






 도착할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공원이 보이지 않자 둘 다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구글 지도를 켜고 방향을 보고 있는데 지도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이 방향이 맞는지 혼동이 되고, 이제는 그냥 이 길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아무 곳이나 보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다. 다행히 공원 가는 출구를 발견해 차를 댔다.


공원 출구를 발견했댔지 로키포인트 공원이라곤 안 했단다


 우리 앞에 무언가 아이스박스 같은 것을 갖고 걸어가는 두 청년이 보였다. 인적이 있어 안심되기도 하고 또 이들 말고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지 않아 무섭기도 했다. 그는 무서울 것 없다고 했다. 

 도움이 크게 되지 않았다.




 구스 친구들을 지나 아래로 내려가니 상서로운 기운이 감도는 낯설지만, 이상하게 동양적이고 친근한 호수가 나왔다. 비가 와서인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널찍한 호수 위에 포근하게 떠 있는 안개, 살짝살짝 내리는 비 덕분에 조금은 차가운 날씨, 아무도 없는 고요함이 어우러져 최고의 시간이 되었다. 우리는 물가를 따라 마련된 산책로를 걸었다.


버나비 바넷 마린 공원


 지도를 다시 켜 보니 이제는 위치가 제대로 나왔다. 이곳은 ‘바넷 마린 공원'이었다. 어쩐지, 유명한 로키 포인트 공원 정도라면 비가 와도 사람이 이렇게 하나도 없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음부터 내비게이션을 꼭 켜자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해 이 공원의 이름을 그에게 알려 주었다. 하지만 사실, 나는 이날 이 조용하고 상서로운 공간에서 산책하여 참 좋았다.


버나비 바넷 마린 공원 - 파노라마 (비염주의)


 물은 어느 구간에선 숨 막히게 조용했고, 어느 구간에선 한껏 파도 같은 물소리를 냈다. 열 길 물속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 같다가도 세차게 움직였다. 멀리서 봤을 땐 탁한 초록빛 같지만, 가까이서 보면 그렇게 맑을 수가 없다. 분명히 날이 좋았다면 이 물도 캐나다사람들 스무 명쯤은 뛰어들어 호수를 오롯이 즐겼겠지.


바넷 마린 공원의 맑은 물과 파도


 산책로를 따라 쭉 걸으려 했는데 빗줄기가 갑자기 거세졌다. 급하게 차로 돌아가 집으로 향했다. 이곳은 잘못 들어간 곳도 이렇게 예쁘네, 캐나다 구스는 진짜 어디를 가나 흔하구나, 근데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사람이 없는 날이 있네, 아까 여기 온 청년들은 그새 보이지 않던데, 어디에 갔을까? 와 같은 많은 질문들과 함께. 안갯속 아름다운 호수가 준 고요하며 풍요로운 산책을 마쳤다. 





 꼭 목적지에 가야만 목적을 달성하는 건 아닌가 보다.

 여행 와서 아름다운 풍경 보며 힐링하고 싶다는 나의 목적은 아주 잘 달성했다.








 하지만 그래도 난 여행할 때 내비게이션을 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하하!



 아무튼.


 로키포인트 공원은 기회가 되면 다음에 가 보기로 하고, 집에 가기 전 아까 삼촌 댁에서 본 와인들을 볼 겸 가게에 들르기로 했다.

 오늘도 성공적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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