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망할 수 있는 특권, 만족할 수 있는 재치
“ 뿌-----, 부 - 푸쉭, 부--, 부--, 쉬익.”
이곳은 내가 밴쿠버에 짧게 여행을 갔다면 아마 3일 안에 방문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밴쿠버 다운타운에 있는 ‘가스타운(Gas Town)’. 여행 가기 전부터 유튜브로, 유튜버에게, 그에게 그곳의 시계가 시시하다는 얘기를 꾸준히 접해 기대감은 떨어진 상태였다. 하지만 여행이란 때로 시시한 것을 굳이 시간 내서 보고 허무해지는 멋으로 가는 것이 아니던가. 실망도 여행 간 자가 맛볼 수 있는 특권이고 설렘이다.
힘겹게 다운타운 어딘가 주차에 성공하고 다운타운(가스타운, 올드밴쿠버)을 걸었다. 새로 지은 높은 유리 건물들과 너른 벌판이 공존하는 버나비와 달리 옛 느낌이 나는 따뜻한 벽돌 건물들과 고즈넉한 거리, 작고 정감 가는 카페들과 그 속의 많은 사람들을 보며 밴쿠버라는 곳에 와 있는 기쁨을 만끽했다.
사람들이 어쩐지 오골오골 모여있는 곳을 보며, 그의 ’저기야‘라는 말을 들으며 시계 곁으로 다가갔다. 시계는 런던의 빅 벤이나 체코의 천문시계에 비해 평범한 형태와 크기였다.
그래도 자세히 보면 옛것 냄새가 나는 디자인과 꽃 시계 판이 귀여웠다. 뻥 뚫린 중앙부에서는 시계를 움직이는 기계들이 쉴 새 없이 상호작용하고 있었다. 유리에 닿을 듯 한껏 가까이서 기계를 구경하는 어린아이를 부러운 눈빛으로 쳐다만 보았다. 15분마다 펼쳐지는 시계의 이벤트를 기대하면서.
시계는 휴대전화 시계와 달리 자신만의 독보적인 시간 체계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정확한 시간보다 조금 더 지난 시간에 밥솥마냥 증기를 뿜으며 노래를 시작했다.
노래 타이밍을 맞추려고 영상을 여섯 개는 찍은 것 같다.
“ 뿌-----, 부 - 푸쉭, 부--, 부--, 쉬익.”
크기도 제멋대로, 리듬도 묘하게 어긋난 음들의 향연이었다. 심지어 마지막 음은 김 빠진 소리가 나서 구경하던 사람들 모두가 같이 김이 빠졌다. 어처구니없음, 싱거움때문에 웃음을 터뜨리며 관광객들은 흩어졌다.
나 또한 예상은 했지만, 생각보다도 더 싱거운 소리에 맥이 빠졌다.
시계 주변에 일렬로 늘어선 기념품 가게 탐사를 시작했다. 시계 소리는 실망스러워도 시계와 그 주변 분위기는 참 따뜻하고 아름다웠으므로. 특별하게 어느 한 가게만 일본에서 수학여행 온 여학생들이 잔뜩 들어있었는데, 역시 귀여운 것을 좀 아는 아이들인지 그 가게의 물건들이 가장 귀엽고 아기자기했다. 여행 초기라 앞으로도 기념품 살 기회가 많을까 싶어 최대한 자제하면서, 하지만 남 눈에는 한 아름 물건을 사서 시계 주변 의자에 앉아 쉬시는 삼촌에게 합류했다. 삼촌은 우리를 기다리면서 시계 소리를 몇 번은 더 들으셨을 것이다.
어쩐지 아쉬운 마음에 한 번 더 시계 소리를 듣고 떠나기로 했다. 시계가 몇 번에 한 번씩은 더 특별한 소리를 낸다고 듣기도 했는데. 조금은, 그래도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 뿌-----, 부 - 푸쉭, 부--, 부--, 부, 쉭.”
"뿌----, 뿌-----, 뿌------, 뿌--------------"
소리는 이전에 들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래도 특별한 시간대라고 마지막에 네 번 알림음을 더 내 준 정도. 한 번 더 소리를 듣고 떠나자고 한 것이 조금은 머쓱해지던 순간이었다. 맥 빠지는 소리가 바뀌면 얼마나 바뀐다고 또 기다렸을까.
”훠우!“
달라진 건 어떤 한 사람의 환호성이었다. 환호성과 박수를 듣자마자 나를 포함한 관광객들에게는 유대감과 함박웃음이 번졌다. 어디서 선장님도 환호성을 거드셨다(히--하--!). 다들 기쁜 마음으로 손뼉을 쳤다. 한 사람의 유머와 용기 덕에 나에게 가스 타운 증기 시계는 그저 시시한 랜드마크에서 따뜻하고 유쾌한 추억으로 격상했다.
기왕이면 나도 누군가의 실망스럽고 시시한 순간을 즐겁게 해주는 용기를 가진 사람, ’ 별로다‘, ’시시하다 ‘, ’ 실망이다 ‘,라는 말을 하는 사람보다는 힘껏 환호성을 지르는 사람이 되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