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은 이해 못 하는 나만의 여행의 낭만
여행에서 낭만을 느끼는 순간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20대 중반까지의 내 해외여행의 기억은 모두 여행사와 함께였다. 그 나라에서 봐야 한다 싶은 건 모두 볼 수 있지만 나의 자유란 없던 기억. 세계적인 박물관에서는 한 시간밖에 있을 수 없고 기념품 가게에서는 두 시간을 보낼 때 느꼈던 억울함이 폭발했다. 여행사 여행은 가지 않겠다 선언하고 가족과의 해외여행과 결별했다.
그 여파인지 타국을 여행할 때 모두가 가는 여행지가 아닌 다소 엉뚱할 수 있는 나만의 장소에 '굳이‘ 다녀오는 데서 낭만을 느낀다. 그 장소가 기대와 달라도 상관없다. 예상과 달리 황량하더라도, 시즌이 지나 으스스한 장식물들이 남아 있는 곳이더라도 자유로움과 해방감을 느낀다. 예상과 달라 느끼는 허무함마저 낭만이라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이번 밴쿠버 여행에서 나만의 엉뚱한 장소(‘굳이 플레이스’라고 할까.하하)는 두 군데였다. 하나는 버나비에 있는 민속촌이었고, 하나는 방탈출 가게였다. 민속촌은 버나비의 옛날 모습을 재현해 놓은 곳이었는데, 옛날 모습을 재현한 곳을 구경하는 걸 좋아하는지라 기대가 됐다. 방탈출은 원래 좋아하는데 최근 통 갈 일이 없어서 그리웠던 차에, 외국에서 방탈출 하면 어떤 기분일까 매우 기대했다.
결론적으로, 그와 그의 가족이 모두 민속촌에 가는 걸 추천하지 않았고, 캐나다에 사는 그의 친구마저 어린이들이 주로 가는 곳이라 말하는 걸 듣고 민속촌은 포기했다. 사실 포기한 다음에라도 누군가가 민속촌에 가자고 했으면 기꺼이 가서 그 어린이들이 보는 풍경을 보았을 것이다. 굳이 여기 온 나의 똥고집에 감탄하며 후회하고 반성했을 것이다. 만족을 한 스푼 곁들여서.
나만의 엉뚱한 장소 후보가 한 군데밖에 남지 않았다. 열망은 짙어졌다. 안타깝게도 삼촌과 숙모는 방탈출 가지 않겠냐는 물음에 그저 웃으시고, 사촌 동생들도 그저 웃었으며, 그의 반응 또한 시큰둥했다. 이러다 방탈출 가게 외관만 보다 출국할 판이었다.
그의 친구와의 약속을 앞두고 넌지시 방탈출에 가지 않겠냐고 제안했다. 마침 그 동생도 방탈출을 좋아한다 하여 소원 성취를 했다. 감격스러웠다. 점심으로 쌀국수를 맛있게 먹고(그루의 지난 여행기, ‘쌀국수로 미슐랭 받을 만하네’ 참조) 방탈출 가게에 갔다.
일단 캐나다는 우리나라만큼 방탈출이 성행하지 않고 있다. 지점 자체도 많지 않고 테마나 방의 완성도도 우리나라에 비하긴 어렵다.
아무튼 난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으니.
다행인 점은 그 단점이 나에게는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것. 당일에 예약이 되었고 현장에서 테마를 바꿀 수 있었다(인기 많은 해리포터 테마 제외). 눈사태를 예약하고 보니 그가 예전에 이 테마를 한 것 같다고 하여(누구랑?) 살인사건 테마로 바꿨다.
결제하려는데 아뿔싸. 가격이 세다. 1인당 35,000원이면 한국에서는 40평 넘는 공간에서 방탈출 할 수 있는데.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버킷리스트를 이루었다는 나의 과다 분비된 도파민이 그 생각을 1초 만에 고이 접어 날려 보냈다. 세 명이 10만 원이 훌쩍. 내 눈도 훌쩍. 아무튼. 스스로 불러온 지출이므로 기쁘게 받아들인다. 방탈출 가면 꼭 듣는 익숙한 자물쇠 설명을 듣고 방탈출을 하러 걸어갔다.
이동하는데 눈가리개 따윈 없다. 직원과 우리가 같이 터벅터벅 방 이름이 써진 곳에 가서 문을 같이 열고 들어간다. 현장이 훤히 보인다. 타이머 켜지기 전에 내부를 보지 말라는 말도 없다. 현장감이나 몰입감에 대한 생각이 없는 것이다. 심지어 힌트도 전화하면 직원이 방에 들어와서 질문에 답해준다 했다. 새삼 한국에서 방탈출 할 때 직원이 방에 들어오는 상황을 겪고 몰입이 깨졌다고 매우 아쉬워했던 나 자신을 낯설게 보게 됐다. 그들은 몰입에 진심이 아니다. 이런 세상도 있는 거다. 아, 이런 곳에 몰입에 진심인 한국 방탈출 도입하면 난리 나겠는걸.
우리가 도착한 곳은 한 살인사건 현장. 넓지 않은 00점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설명을 읽는 것보다 여기저기 뒤지고 찾는 게 성미에 맞는 나는 열심히 수색을 시작했다. 아시다시피 이 방탈출은 한국 방탈출과 치명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 모든 글씨와 음성이 영어라는 것. 캐나다인 두 명 사이에 끼인 토종 한국인으로서의 자존심으로 눈이 빠지게 열심히 영어를 보고 음성을 들었다. 전화로 들리는 영어는 그냥 영어보다 알아듣기가 더 어려웠지만. 셋이 단서를 발견하고 문제를 푸는 포인트가 절묘하게 달라 제법 합이 잘 맞았다. 드디어 첫 번째 방을 통과했다!
두 번째 방은 내 기대보다 작았다. 어두워서 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설마 방 두 개가 끝일까? 그런데 어쩐지 전 방의 크기와 퀄리티를 고려했을 때 방이 두 개일 거라는 높은 확신이 들었다. 아… 그런데 이 공간부터 내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영어로 된 문서가 너무 많이 나왔다. 나는 놀고 싶지 영어 독해 공부를 하러 온 게 아니다! 엉엉. 그래서 다른 단서를 찾는 척 두 캐나다인에게 독해를 맡기고 여기저기에서 자물쇠를 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점점 진상에 다가가긴 하지만 중요한 스토리를 조금 놓친 기분…. 몇 분 남았지? 여기는 타이머도 눈에 잘 안 띄네. 이러다 설마 탈출 못 하고 끝나버리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걱정대로였다. 우리가 들어왔던 문을 열고 점원이 들어왔다. 거기서 우리의 방탈출 여정은 끝났….
을 리가 없다.
교활하지만 최대한 억울하고 어눌한 말투로 직원에게 말했다.
“I’m foreigner… It’s too difficult… please give me more time!”
다행히 우리가 방문한 시간에 손님이 많지 않아서 그런지 직원은 살짝 고민하다 추가 시간을 더 주었다(추가 금액을 결제하겠다고 했는데 그냥 넘어가 줬던 것 같은 가물가물한 기억). 의욕이 다시 한번 타올랐지만, 마지막 탈출 전 딱 한 문제를 남겨 두고 수사가 미궁에 빠졌다. 여기도 봤는데, 저기도 봤는데, 아무리 찾아도 알 수가 없었다. 턱없이 적게 남은 시간과 실오라기만 한 힌트도 못 찾은 우리.
결국 추가시간이 주어졌음에도 탈출에 성공하지 못하고 아쉽게 방을 나와야 했다. 직원은 우리가 놓쳤던 두 개 정도의 과정을 알려 주었다.
아…….
그걸 놓쳤구나.
탄식하며 로비로 나왔다.
방탈출은 제 손으로 꽤 많은 돈을 내고 갇히므로 탈출하지 못할 때의 패배감과 아쉬움이 크다. 규모가 작고 방탈출이 별로라더니, 그런 방도 탈출하지 못하다니! ‘캐나다 방탈출’ 자체가 목적이었으니 망정이지. 탈출은 하지 못했지만 한국과 다른 방탈출을 경험하고 떠날 수 있어서 여전히 들뜬 기분이 남아 있었다. 탈출 실패의 쓰라림을 뒤로하고 판도 열심히 꾸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누가 별로라고 해도, 인기가 없어도. 내가 엉뚱하게 가고 싶은 그곳에 굳이 가 보면 의외의 풍경을 얻든지, 교훈을 얻든지, 통찰이라도 얻든지, 실망 속에서도 재미와 의미가 꼭 있다. 캐나다의 방탈출도 누군가에게 꼭 추천할 만한 경험은 아니지만, 체험하지 않았다면 두고두고 궁금하고 기대하고 아쉬워했겠지.
막상 해 보면 별것 아니라고 실망할지언정,
나는 앞으로도 나만의 요상한 궁금증을 ‘굳이~’ 해결하면서 여행하고 싶다.
별것 아닌 곳을 굳이 가는 것이 나의 여행이고
내 여행의 낭만이다.
하지만 이런 그루에게도
굳이 안 갔으면 좋겠다 싶은 곳들은 있었는데......
(나중에 알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