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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진 건 호수일까 내 마음일까

호수를 보고 사람을 떠올렸다

by 정그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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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여름 재스퍼에는 아주 아주 큰 불이 났다. 산림과 동물들, 그리고 인간들에게 피해가 컸다. 밴프에서 재스퍼로 가는 길목 자체가 폐쇄되고, 숙소와 국립공원이 문을 닫았다.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비가 많이 와 주거나 신의 손길이 닿기를 바랄 뿐. 캐나다에 와서 나 정도는 먼지로 보일만 한 큰 산이 가득한 넓은 땅, 인간이 도저히 끌 방도가 없는 큰 불을 보면서 새삼 인간으로서 겸손해지고 두려워졌다.


다행히 어느 정도 화마가 정리가 되고, 우리가 재스퍼에 가기로 계획한 이틀 전에 관광이 재개되었다. 재스퍼는 여전히 갈 수 없지만, 재스퍼 가는 길에 있는 호수와 빙하까지는 보러 갈 수가 있었다. 빙하 관광은 예약을 해서 관람 시간이 확정되어 있고, 가는 길에는 보고 싶은 호수(페이토호수, 보우호수 등)가 잔뜩 있었다. 시간이 되는 만큼 빙하 가는 길에 보고 못 본 건 돌아오는 길에 마저 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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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 일어나 출발하는 길. 재스퍼에 가는 길 자체도 무척 아름답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역시. 길 양옆으로는 멋진 산과 빙하, 왼쪽에는 아름다운 호수가 종종 보이니 길 자체도 행복이었다. 쨍한 햇살이 비칠 때가 가장 감동적. 원래도 예뻤던 강물이 말 그대로 무슨 색소를 쓴 것처럼 아름다운 우윳빛으로 보였다.



IMG_1304_2.JPG?type=w1 이렇게! 사진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햇빛을 받은 물결이 반짝반짝한 것이 감동이었다.


보우 호수도 그랬다. 호수를 지나가면서 그냥 지나가기에는 너무 아까운 기분이 든다고 하자 그는 호수 주차장으로 차를 돌렸다. 주차장은 이번에도 만석. 누군가 나갈 기미도 없었다. 차를 임시로 대 놓고 얼른 구경하고 오기로 했다.


차를 금세 빼야 해서 마음이 급해서 그런지,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런지, 햇빛이 잠시 구름에 가려져서 그런지, 차 안에서 보던 환상적인 느낌이 나지 않았다. 광활한 호수를 조금 보고는 쫓기듯 달려와 차에 탔다. 이따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번 호수를 보러 오자고 다짐하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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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이 꽤 섞인 날이라 그 이후 본 호수도 빙하도 한껏 반짝였다 한 풀 숨이 죽었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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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 구경을 다 마치고 돌아오는 길, 해가 워낙 늦게 지는 곳이라 아직 바깥은 밝았지만 쨍쨍한 기운은 없어진 상태. 늦은 시간 다시 보우 호수에 갔다. 이미 시간이 늦어서 그런지 차도 사람도 거의 없었다. 여유롭게 차를 대고 호수를 보러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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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아까와는 느낌이 전혀 다른 호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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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간에도 빛에 따라 느낌이 사뭇 다름


아까는 탁한 느낌의 아름답고 쨍한 호수였는데 해가 한풀 꺾이고 나니 한껏 투영하고 맑은 호수가 보였던 것이다. 저녁에 부는 쌀쌀한 바람과 광활하고 맑은 호수를 보니 마음이 탁 트이는 느낌. 무엇보다 사람에 치이지 않고 강을 볼 수 있는 것이 무척 해방감이 들었다. 오늘 처음 만났고 여러 번 만난 것도 아닌데 맘에 꼭 들고 정겨운 기분. 그동안 본 어떤 유명한 호수보다 지금 이 순간 보는 호수가 가장 마음에 들었다.


“나, 그동안 본 호수 중에 여기가 제일 좋아.”


마음 같아선 의자라도 두고 몇 시간이고 구경하고 싶었지만 춥고 배고픈 탓에 사진을 찍고 오래 지나지 않아 호수를 떠나왔다. 아쉬운 마음도 조금 남았지만 이렇게 다시 한번 같은 호수에 와서 전혀 다른 느낌을 받고 돌아갈 수 있어 행복하고 감사했다.




그 이후에도 세 개 넘는 호수를 보고 감명을 받았지만 내 마음속에는 계속 이 호수가 마음에 남았다. 다녀오고 나서도 분명 사람들에게 이 호수가 최고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나도 간사한 것이 그전에 찍은 호수들이 누가 봐도 신비롭고 아름답게 찍혔다 보니 돌아오고 나서는 점점 사진이 잘 찍힌 호수에 정을 주고 있었다. 햇빛에 따라 변하는 게 호수라지만, 그 호수보다도 더 많이 변하는 게 내 마음인 것 같다. 햇빛을 한껏 받아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호수 사진에만 눈길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호수만 그럴까, 사람도 그렇겠지. 햇빛을 한껏 받았을 때 본 그 사람은 눈부시고 아름답겠지만 그늘질 때 모습은 별로일 수도 있겠지. 햇빛 아래 있는 사람들은 두려울 게 없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겠지. 하지만 때로는 그늘진 사이에 보이는 누군가의 참모습을 더 사랑하는 이도 있겠지. 나도 누군가에게는 햇빛 같은 사람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어둡고, 누군가에게는 생각이 바글바글한 정신없는 사람이었겠지. 누군가의 찰나의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안다고 생각해선 안 되겠지, 사람 위의 구름을 보고 이해해 줄 줄 아는 경지까지 가면 좋겠는데, 생각의 타래를 맘껏 풀며, 호수를 보고 사람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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