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어찌어찌 백일이 되었습니다
백일은 삶에서도 꽤 중요한 날입니다. 무엇을 하던 100일을 맞게 되면 살짝 흥분이 됩니다. 그동안 그 무엇을 해 온 시간이 스스로 대견하고, 그동안 그 무엇을 포기하지 않고 유지해서 다행이고, 그동안 그 무엇으로 인해 새로움을 느껴서 기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산을 오를 때, 씩씩하게 정상까지 한달음에 오르는 사람의 체력이 가끔은 부럽기도 합니다. 나도 한 번쯤은 꼭 해 보고 싶은... 그런 로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압니다. 그런 내공이 저한테는 없다는 걸 그래서 그저 차곡차곡 한 번에 하나씩만 나아가야 한다는 걸 압니다. 그나마 다행입니다. 아직 지구력은 제법 괜찮으니까요.
아기들은 본능적으로, 부모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해도 그들이 자신에게 좋은 감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란 것과 자신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소통을 하려고 입을 오물거리곤 합니다. 아기의 옹알이가 시작돼도 물론 부모들이 다 알아들을 수는 없습니다. 그러다 어느날 문득 '엄마, 맘마'등 몇 단어를 뱉기 시작합니다. 감정도 더 세분화되면서 표정도 풍부해집니다. 간단한 단어 외에도 조금 더 복잡한 문장으로 표현을 시도하며 성장합니다. 처음엔 표정과 단순한 소리로 그 이후엔 단어로 그렇게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태어나서 100일이 되면 백일떡을 해 먹습니다. 아이의 건강을 기원하고 잘 자라준 기특함을 격려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골고루 떡을 돌리며 아이와 부모들은 축하를 받습니다. 아이는 드디어 100일이 되어서야 태어날 때의 몸무게가 3배 정도로 급증을 하면서 튼튼하게 자랄 바탕을 갖추게 됩니다. 아마도 세상에 나와서 견딜만한 체력과 힘을 기르기까지 ‘그만큼의 시간은 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어쩌면 우리가 무엇을 하던 익숙해져서 자신의 것이 될 토대를 만들기까지는 최소한 ‘그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뜻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갑작스러운 마음으로 급급하게 공부를 하다 보니 플리즈와 익스큐즈미, 땡큐가 절대 안 따라옵니다. 입으로 써본 적이 거의 없어서일까요? 마치 있지만 없는 말처럼. 말에 여유가 없어서일까요? 아니면 문화를 이해하지 못해서 그런 걸까요? 아직은 아리송하지만 여하튼 한국어에서도 모르는 사람에게 처음 말을 걸거나 할 때, 실례합니다나 잠시만요, 혹시요~ 감사합니다 등등 사용하는데 왜?.... 그런데 하물며 다른 나라 말에서 양해 표현을 제외하는 용감함 이라니! 습관처럼 한 박자 쉬고 꼭 붙여쓰기 연습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소리를 듣고 소리를 띠라 한다고 언어의 기능으로 진짜 소통을 하는 건 아닙니다. 말이 생겨나고 쓰이게 된 배경을 생각하며 배우면 굳이 외우려 하지 않아도 입에 붙고 귀에 익을 텐데 아직은 자꾸 외우던 방식을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자꾸 잊어버려 다시 반복해서 봐야 하면서도... 나쁜 습관은 고치는데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리는군요. 스픽은 '헌드레드~' 라며 축하를 해 줬지만 정말 그동안 잘 해온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실력은 제자리인 것 같아 내심 착잡합니다.
생각해 보면, Excuse me를 ‘미안합니다 ‘로 배워서 그런 것 같습니다. 뭔가 잘못했을 때 사용해야 할 것 같은 부정적인 느낌이 강합니다. 그러다 보니 잘못한 게 없는데 굳이 익스큐즈 미를 외칠 일이 없다고 무의식이 그렇게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Please도 하고 많은 의미 중에 ’부디, 제발‘ 로만 배웠다는 게 답답할 뿐입니다. 뉘앙스로 뭔가 아쉬워서 쩔쩔매는 그런 느낌이 싫었던 것 같습니다. 그저 양해 표현 정도로만 가볍게 배웠더라면 조금은 쉽게 접근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리고, 땡큐~ 이 말은 왜 안 쓸까요? 우린 매번 어떤 상황의 마지막 말로 수고하세요~ 를 주로 사용합니다. 범칭으로 사용하는 개념이다 보니 굳이 구분해서 정말 감동받지 않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두루뭉술한 언어 습관이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데 방해가 된다는 걸 깨닫습니다. 요즘 느끼는 것이지만, 영어를 다시 배우면서 감정의 세분화에 맞는 섬세한 우리말 언어 사용에도 좀 더 신경을 써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