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타리 하나로 세상 밖 모든 세대들의 시간을 버텨낼 수는 없다
트로이가 만들려던 울타리는 세상에서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자기 인생의 한계를 분명하게 표시해 두고 싶었던 것이었을까?
1983 토니상을 수상한 어거스트 윌슨의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연극을 원작으로 한 <펜스 FENCES>, 덴젤 워싱턴이 감독 겸 주연을 맡은 작품입니다. 니그로 리그에서 활약했던 트로이 맥슨(덴젤 워싱턴)은 한때 야구선수로 잘 나가는 인생을 꿈꿨지만 흑인이란 이유로 메이저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채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야구선수로서 자신의 꿈을 포기하고 로즈(비올라 데이비스)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평범한 삶을 살며 가족을 위해 헌신합니다.
흑인으로 태어나 기회조차 갖지 못한 것들, 조금만 어긋나면 인생이 곤두박질할 수 있는 상태의 삶을 살아온 트로이는 자신의 헌신으로 가족들이 잘 지내길 바랍니다. 흑인이라는 한계를 너무나 잘 알기에, 미식축구에서 성장 가능성을 보인 코리에게 대학 미식축구팀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오지만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지독하게 포기를 강요합니다. 하지만 트로이는 자신이 살던 때와 달리 세상이 변한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가정을 지키고 사느라 자신을 잊고 지낸 시간들, 자식들의 성공을 위해 헌신하면서도 자신의 잘못을 되풀이할까 두려워 아예 시작을 못하게 하는 아버지, 트로이는 잘못된 부성애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가정에서 묵묵히 가족들을 돌보는 로즈의 끝없는 희생 역시 여느 어머니의 전형이지만 트로이 못지않습니다. 잊고 지냈던 자신과 삶의 허망함을 문득 깨달으며 외도로 아이를 낳아오는 트로이는 정말 용서힐 수 없는 캐릭터입니다. 그걸 또 받아주는 로즈... 그 와중에 아버지를 벗어나려 그렇게 애를 썼건만 결국 감옥에 간 라이언스는 아버지의 삶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렇게 트로이가 집착하며 만들고 싶었던 울타리는 자신과 가족의 안전을 위한 것이었지만 세상은 늘 울타리 밖에 존재했고 가족들에겐 그의 안전한 공간이 오히려 무섭고도 답답한 감옥이 됩니다. 코리가 자신이 아버지의 그늘에서 얼마나 힘들고 두려운지, 사사건건 자신의 발목을 잡는 아버지가 얼마나 싫은지 솔직하게 말하지만 트로이는 오히려 세상이 얼마나 냉정하고 무서운 곳인지만 반복해 말할 뿐입니다.
트로이가 죽고 난 영화의 마지막엔 결국 근사한 울타리가 쳐지지만, 그 안에서 남은 가족들은 과연 행복할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지독하게 편협했던 아버지의 잘못된 그림자에서 한 번만이라도 벗어나고 싶다며 장례식 참석을 거부하던 코리의 마음에 충분히 공감이 가는 이유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살지 못한 로즈에게서 또 다른 트로이의 모습을 보게 되지만, 삶이란 또 그런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트로이 역시 자신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들 때문에 가족을 사랑하는 방식도 왜곡된 안타까움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짊어진 가장으로서 무게의 부담 때문에 외도를 했다고 정당화하는 장면은 할 말을 잃게 합니다.
누구의 인생이 맞고 누구의 인생이 틀린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누구나 자기 인생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식이라도 그들의 인생은 그들의 것입니다. 그들의 살아가는 방식이 설사 이해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는 그 이유 역시 그들의 것입니다. 울타리 밖의 세상에서 처참하게 깨지고 망가질지, 화려한 꽃을 피울지 알 수 없지만 그들은 그들의 길을 가야 합니다. 단지, 부모들은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격려하며 응원하고, 그 과정을 그저 바라볼 뿐입니다.
너무 답답하고 적나라해서 아주 짜증 나는 영화입니다. 한 가족의 이야기가 그냥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부모는 우리의 부모이고 자식은 우리 자신입니다. 힘들게 살고, 자신이 하고 싶었던 것에 실패한 인생이지만 그래도 가정을 이루고 안전하게 지키고 싶은 아버지의 고집과 악다구니를 만납니다. 그 속에 자신의 인생을 살아보지 못하는 엄마와 자식들의 모습은 풀기가 없습니다. 아버지의 울타리는 트로이 자신이 넘어서지 못했던 한계의 마지막 경계일 테지만, 남은 가족들에게는 세상을 향한 새로운 시작점으로 작용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