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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ruwriting Feb 14. 2024

그래도, 설날 세뱃돈은 기분이 좋아

시절이 변하고 세뱃돈도 변했지만 마음의 복주머니는 가득 채워지길...


어릴 때 설날은 무조건 일 년 중 가장 좋은 날이었습니다. 당시엔 크리스마스나 다른 행사가 있는 날보다 설날엔 세뱃돈을 받을 수 있어서 기다려지는 날이기도 했습니다. 점점 자라면서 크리스마스에 산타가 오지 않는다는 것과 산타는 현실에 있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아 가는 것처럼 설날의 세뱃돈에 대한 생각도 현실적으로 바뀝니다.





예전 어릴 땐, 설날 전 섣달그믐 저녁부터 시골 동네 친척들 집을 돌며 인사를 다녔었습니다. 묵은세배를 하는 절차가 있었습니다. 한 해를 어른들 덕에 잘 지냈다는 감사 인사의 일종이었는데요, 초저녁부터 돌아다니다 보면 새벽에야 끝이 나서 정작 설날 아침엔 비몽사몽으로 차례를 지내고 세배를 하곤 했습니다. 간혹 묵은세배에서도 세뱃돈(?)을 받기도 했었습니다. 물론, 받은 세뱃돈은 비록 모두 엄마에게 고스란히 전달(?) 해 줘야 하는 돈이었지만 그래도 잠시나마 1박 2일 동안 두둑한 복주머니 속의 바스락거리는 지폐의 느낌을 즐길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설날의 기분을 한껏 낼 수 있었고 설사 나중에 그 돈이 무엇에 쓰이고 무엇을 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개의치 않았습니다.






복주머니에 뭐라도 넣어주고 싶다


시대가 변해서일까요? 요즘은 어린아이들도 엄마에게 돈을 맡기지 않습니다. 각자 나름의 계획을 갖고 직접 소비를 하거나 저축을 하려고 합니다. 부모들도 예전과 달리 재테크에 관심을 두고 아이들 몫을 챙겨둡니다. 오랜만에 받은 세뱃돈으로 사과 한 알(이번 설에는 정말 사과 한 알 가격이 만원이었습니다.) 걱정하지 않고 사 먹을 수 있게 되었다며 주고받는 다 큰 자식들의 농담은 조금 씁쓸하게 느껴집니다.




어른이 되고 부터는 세뱃돈을 줘야 합니다. 자라서 취업을 했으니 처음엔 부모님에게, 나중에 결혼을 해서는 자식과 조카들까지 챙겨야 할 범위가 늘어납니다. 조금씩 고달파집니다. 어른값을 해야 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어엿한 어른 구실을 하며 지나가고 싶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습니다. 사실 전 아이들이 성인이 되고부터는 기분만 내는 편입니다. 그래도 나름 서운할 수 있으니 기념 삼아 작은 지폐 한 장만 쥐어줍니다. 그래도 자식이니까요. 웃으며 아이들은 서운한 척, 저는 할 일을 다한 척 그렇게 지냅니다. 대신 덕담에 신경을 씁니다. 취업을 했는지, 결혼 계획이 있는지, 학교 생활은 어떤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습니다. 다들 잘 알아서 할 테니까요. 다만, 말이라도 기운을 낼 수 있길 바라면서 그들의 '마음 복주머니'에 뭐라도 넣어주려 애씁니다. 자주 아팠다면 가장 먼저 건강을 챙길 수 있도록,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면 무게를 덜어낼 수 있기를, 의기소침해 있다면 명랑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기를, 자신의 행동과 마음에 책임질 수 있는 멋진 어른으로 나아가길 기원하며 하나하나 마음을 전합니다.






시절은 가난해도 마음은 풍요롭기를...



사과, 오이, 대파만 사 먹으면.... 음,  이 세 단어가 물가를 직관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사실에 적잖이 놀랐던 올해 설날이었습니다. 그만큼 다들 살기가 팍팍하다는 의미겠지요. 예전보다 훨씬 더 물질적으로 풍족한 지금 언뜻 보기엔 더 여유가 있어 보이기도 하지만 상대적인 격차와 알게 모르게 자꾸 옹색해지는 마음들이 불편합니다. 오히려 다들 똑같이 없던 시절의 세뱃돈을 주고받던 풍경이 조금 더 훈훈함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어차피 써보지도 못하는 세뱃돈이 들어 있는 복주머니를 품고 잠들며 마냥 행복해하던 시절, 돈에 대해 무지했지만 나름 순수했던 좋은 시절이었습니다. 비록 시절은 모두 가난했지만 마음은 너그럽고 풍요롭게 지내던 때였습니다.




연휴도 짧고 아직 여러 바이러스가 돌고 있어서 모처럼 집에서 명절맞이를 하며 지냈습니다. 명절의 풍경은 늘 그렇듯 크게 다르지 않았자만 왠지 마음은 많이들 쫓기는 것처럼 피로하게 지나갔습니다. 예전 떡국을 함께 나눠 먹고 세배를 주고받으며 느긋하게 함께 모여 놀던 놀이들 - 윷놀이, 연날리기, 널뛰기, 놋다리밟기, 보름까지 이어지는 고싸움, 줄다리기까지..  - 도 즐길 겨를이 없습니다. 어쩌면, 머지않아 이런 시끌벅적하던 놀이들은 고궁에나 가야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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