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물어오는 학부모라면아이의 담임에 대해 존중의 의사를 갖고 최대한 의견을 들으려는 태도를 가지신 분일 것이다.
"선생님은 제 아이가 '문제'가 있다고 보시는 거예요?"
질문의 본질은 같은데 학부모가 이렇게 물어오기 시작한다면 아무리 합리적인 설명을 구구절절해도 아름다운 결말을 맺기가 어렵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같은 질문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상대방의 기분과 태도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예로 든 두 경우와 똑같은 방식은 아닐지라도 결국 아이에 대해 '문제'로 다가가는 어른의 시선이 다분히 담긴 두 질문은, 어느 쪽에도 손을 들어주기는 어렵다.
양쪽 모두 탐탁지 않은 이유는, 아이의 행동을 '문제' 상황으로 인식해 출발하면 해결 과정이 괴롭기 때문이다. 문제는 방치하면 더 큰 문제가 될 것이므로 즉시 해결해야 할 사안이 된다. 원인을 파악하고 필요한 조치를 취해 없애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행동은 이런 일반적인 문제 해결 과정을 따르는 데 무리가 있다. 물론 문제의식을 갖고 능동적으로 대처하는 자세는 중요하다. 하지만 아이를 문제의 씨앗으로 보고 나쁜 싹은 싹둑, 잘라서 문제의 근원을 없애야 한다는 어른들의 관점이 조심스럽다는 얘기다.
문제가 있어 보이는 아이도 들여다보면 결국 '관심'이 필요한 아이다. 관심이 필요한 아이는 관심을 받고 싶어 하는 상대에게 자신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낸다. 보통은 고분고분 말을 잘 듣는 모습이나 칭찬받을 행동을 하는 모습으로 드러나지만 때로는 별 이유 없이 다른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반항하는, 소위 '문제 있어 보이는' 방식으로 드러내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결국 목적은 같다. '제게 관심을 주세요.'라는 신호인 것이다.
몇 년 전 제자였던 동혁(가명)이는 또래보다 덩치도 크고 목소리도 큰 남자아이였다.
초등 2학년 아이들은 아직 1학년 아이처럼 몸집이 작은 아이들도 많기 때문에 큰 몸집에 힘도 세고 목소리가 큰 동혁이와 놀다 보면 문제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동혁이와 놀다가 갈등상황이 생겨 불려 올 때면 동혁이는 우선 자기 자신을 변명하기 바빴다. 자신이 얼마나 결백한지 증명하느라 "그게 아니고요!"로 시작하는 말을 숨도 잘 안 쉬고 이어 말하느라 저러다 호흡곤란이 오지 않을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처음엔 가만히 들어주었지만,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언젠가 또 다른 친구와 문제가 생겨서 이름을 부르니, 동혁이는 또 "그게 아니고요~"로 자신을 변호하려고 했다.
"선생님은 너를 야단치려고 하는 게 아니야."
아이의 흥분을 잠시 식힐 요량으로 건넨 말에, 열 올랐던 동혁이의 눈빛이 순간 부드러워졌다. 그 모습을 보고 동혁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 그때야 알았다. 동혁이에게서 "그게 아니고요!" 핏대를 누그러뜨려주는 것은 자신이 야단맞지 않을 것이라는 '신호'였다.
동혁이는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있음을 이미 직감하고 있는 아이 었다. 그래서 선생님이 불렀다면 반드시 혼나게 될 것이라고 혼자만의 시나리오를 머릿속에 플레이시켰는지도 모른다. 상상력이 높아지는 2학년 시기에 인과 관계를 어렴풋이 연결 지을 줄 아는 아이들은 자신이 한 행동이 어떤 결과를 야기할지 스토리를 써 간다. 아이의 불안과 걱정, 안전하지 못할 자신의 처지 등을 감안하면 동혁이의 본능적인 행동은 스스로를 지켜내려는 '자기 방어'에 다름없었다.
그러나 '너를 야단치려고 하는 게 아니다'라는 신호는 그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을 어루만지는 효과를 발휘해 주었다. 아이의 눈빛이 부드러워진 뒤에는 나의 개입이 거의 필요가 없었다. 아이들은 이미 문제 상황이 발생할 때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배웠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사가 할 일이 있다면 함께 이야기를 나눌 친구들 중 누가 먼저 이야기할 것인지 순서를 도와주는 일 정도이다.
아이들은 생각보다 자신의 상황을 더 잘 인지한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자신의 행동이 잘못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스스로 잣대가 있다. 그렇지만 자신을 지켜내려는 것은 본능이다. 엄한 말투와 무서운 표정은 아이로 하여금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신호를 준다. 그때 아이에게 필요한 것은 노란 신호등이다. 본능으로 치닫는 생각을 멈추게 하는 신호등. '선생님이 나를 야단치려는 것이 아니구나!'를 알려주는 노란 신호등을 켜주면 아이의 불안한 빨간 신호등에도 '잠시 멈춤' 신호가 깜빡이기 시작한다.
"첫걸음을 하다 고꾸라져 넘어지는 아이들은 대부분 곧장 울음을 터뜨리지 않고, 이것이 뭔가 좋지 않은 일인지 알기 위해 자기가 애착을 느끼는 인물을 쳐다본다.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서 울기 시작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이다."
-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 나탈리 크납
일단 문제에 처한 아이가 교사를 애착을 느끼는 상대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전제가 필요하지만, 스스로 판단을 내려본 경험이 부족한 아이들에게 선생님은 절대적인 신뢰의 대상일 수밖에 없다. 교사로서 나의 시선이, 생각이 얼마나 아이들에게 큰 영향을 미칠지 생각하면 한없이 어깨가 무거워진다.
부모로서, 교사로서의 어른이 아이에게 어느 선까지 개입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일은 매우 고민스러운 일이다. 아이가 자라면서 보이는 여러 가지 양상을 보며 그때 내가 너무 개입한 것은 아니었는지, 반대로 그때 너무 무심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엉킨 실타래 같은 부모의 고민은 풀어낼 고리를 찾기가 쉽지 않다.
아이를 둘러싼 어른들의 걱정하는 모습과 태도가 아이의 마음을 더 불안하게 만들기 쉽다. (사진 출처: pixabay)
"내 아이에게 '문제'가 있나요?"라는 질문은 "내 아이에게 어떤 '관심'이 필요할까요?"로 바뀌어야 한다.그리고 그'관심'은 아이가 애착 관계에 있는 대상으로부터 '그 정도는 괜찮아'라는 신호를 받는 것으로 족하다.
부모나 교사는 어린아이들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넘어설 수 없는', '모든 것을 알고 정확한 판단을 내리는 강한' 존재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가만히 손을 얹고 생각해 보라. 스스로가 아이의 그런 생각에 얼마나 못 미치는 존재인지.
우리 시대 주목해야할 독일 철학자, 나탈리 크납은 「불확실한 날들의 철학」에서 말한다.
"아이들은 그들이 어떤 상황을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언제 행동이 필요한지 스스로 가늠하는 법을 차츰차츰 배워나간다."
어른들은 아이들보다 '훨씬 나은' 존재가 아니다. 단지 아이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살아오면서 생긴 경험치 덕분에 연습을 먼저 많이 해 본 것일 뿐. 그러니 아이들이 연습을 통해 차츰 그들의 방식을 배워 나갈 수 있도록 돕는 것. 이것이 부모로서, 교사로서 우리 어른이 해야 할 최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