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교생이 64명인가, 했던 시골 학교였다.
20여 년 전, 나의 첫 임용지였다. 우리나라에서 단위 면적당 가장 인구수가 적다던 지방에 위치했던 그 시골 학교는 논과 밭으로 둘러 싸인 곳이었다. 학생수가 적어서 당연히 학급수도 6 학급뿐이었다. 그나마 1, 2학년은 복식 학급이라 하여 교사 한 명이 1, 2학년 학생들을 한 교실에서 함께 지도하였으니 실상 5개 반뿐인, 최소 규모의 학교였다.
보통 쇠락한 시골 학교가 그렇듯, 과거에는 많은 학생들로 북적였던 시절도 있었을 터였다. 젊은 사람들이 도시로 떠나가고 노인들만 남은 시골엔 아이들도 귀하니 학교엔 자연적으로 빈 교실이 많아졌다. 드넓은 운동장에 뛰노는 몇 안 되는 학생들을 보고 있노라면 학생수가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운동장이 커져 가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도시로 나가 살던 자식들이 이러저러한 이유로 어려운 형편인 시골 조부모 댁에 손주들만 맡긴 집들이 많았다. 그러니 아이들에게 방과 후 학원은 언감생심이었다. 몇 안 되는 학생들을 상대로 학원들이 들어설 리도 없었다. 중소도시에서 학교를 다녔던 내가 어렸을 때보다 더 시골 같던 곳이 내 첫 부임지였다.
첫 학교, 첫 수업, 첫 제자… 그곳에서는 모든 것들이 '첫' 번째 경험이었다. 여러 가지 첫 경험들 중,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하는 사회생활은 이전에 기간제 교사로 있던 경험과는 사뭇 달랐다. 이제 갓 발령받아 아무것도 모르던 내게 꼬박꼬박 '선생님' 호칭을 붙여주시며 존중해주시던 교감, 교장 선생님과 다른 선배 선생님들 덕분에 피상적으로나마 쫄보 신세를 면할 수 있었다.
처음 맡은 학년이 5학년이었다. 한 학년에 한 반씩 밖에 없다 보니 동학년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래서 1-2학년, 3-4학년, 5-6학년 2개 학년씩을 묶어 함께 교육과정을 짜고 행사도 함께 치렀다. 5학년과 6학년이 같은 날, 같은 장소로 함께 현장체험학습을 가는 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6학년 선생님과 많은 것을 의논하고 공유해야 했다.
내 반 옆 교실에 위치했던 6학년 선생님은 정년을 2년인가 남긴 60대 남자 선생님이셨다. 원래대로라면 이미 정년을 하셨을 연세였지만 호적에 늦게 오른 덕분에 다른 분들보다 2년 정도 더 할 수 있다고 좋아하셨던 기억이 난다. 이 분이 머리가 어느 정도 벗어지신 분인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부분 가발을 쓰셨던 건 분명했다. 가끔 시골 바람이 휑- 불때면 그것이 날아갈세라 손으로 꼭꼭 누르곤 하셨는데 이 모습이 우스워서 당시 미혼이었던 유치원 선생님과 눈빛을 교환하며 웃음을 눌러 참곤 했다.
그분은 여러 가지로 미스터리 한 분이셨다. 일단 '가발'의 존재가 20대 미혼 여성인 내게는 생소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교직의 생리에 서투르기만 했던 나는, 그 연세쯤 되셨으면 교감, 교장을 하셔야지, 왜 평교사로 남아계시는지도 의문스러웠다.
게다가 그분은 경기도에 본댁이 있던 분이셨다. 그 당시에 전국적으로 명예퇴직(이하 '명퇴')붐이 일어 명퇴 교사가 많았던 때였다. 그러다 보니 오히려 교사 수급상에 문제가 생겨 내가 있던 지역에서는 명퇴 교사에게도 복직의 기회를 열어주었다. 그 기회를 잡고 다시 학교로 들어오신 분이었다.
그 연세에 무슨 연유로 가족들과 떨어져 그곳까지 내려오셔서 홀로 밥 지어 드시며 시골 생활을 하시는 것인지, 세상 경험이 부족했던 나는 그저 가끔 마음이 쓰일 뿐이었다.
교사 수가 적다 보니 좋은 의미에서는 가족 같았지만, 직장 동료들이 가족처럼 편할 수는 없었다. 아침부터 퇴근할 때까지 교실 밖만 나오면 드러나는 나의 일거수일투족이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 눈에 뜨이는 게 거북해서 화장실도 두 번 갈 것을 꾹꾹 참아 한 번만 가기도 했다.
어르신들은 참 궁금한 것이 많으셨다. 이 선생님께서도 나를 볼 때마다 뭔가를 자꾸 물어보셨는데, 가끔은 매우 사적인 질문도 아무렇지 않게 하셨다. 남자 친구가 있냐고 물으셔서 있다고 했더니 몇 살인지, 뭐하는 사람인지 꼬치꼬치 캐물으셔서 좀 난감했다. 그래서 일적인 것 외엔 되도록이면 동선이 안 겹치도록 신경을 썼다. 그래도 거북할 정도는
. 아니었다. 가족과 떨어져 홀로 계시면서 많이 적적하시구나, 싶어 한편 내 아버지인 듯 안쓰러웠다.
명예퇴직을 하시기 이전에는 관리자 승진을 위해 교무부장도 여러 해 하셨다고 하신 그 분은 교육과정에 있어서는 척척박사셨다. 뭘 여쭤봐도 다 알려주시고 내가 잘 못 알아듣는 것 같으면 교육과정을 미리 짜시고는 나더러 그대로 가져다 쓰라고 하셨다. 그땐 너무 감사했는데 지나 보니 나중에 혼자 해야 했을 땐 처음부터 다시 공부하느라 버거울 때도 있었다.
그 선생님이 가르쳐 주셨던 많은 것들 중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 바로 '슬로우 앤 퀵(slow and quick)' 룰이다. 당시 초보 운전자였던 내게 운전할 때 이거 하나만 기억하라고 가르쳐주신 것이었다.
직선 도로에 비해 굴곡진 도로를 운전할 때 어렵다고 했더니 해주신 말씀이셨다. 곡선 도로에 진입할 때는 슬로우, 일단 들어서면 퀵, 하고 빠져나오면 된다던 그 말씀은 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곡선 도로를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명언이다. 실제로 이 '슬로우 앤 퀵'을 머릿속에 떠올리며 운전하다 보면 어려운 곡선 구간을 운전할 때도 내가 굉장히 운전을 잘하는 것 같은 착각이 들곤 한다.
그런데 이 '슬로우 앤 퀵'이 비단 운전에만 국한된 룰은 아닌 것 같다. 살다 보면 굴곡진 길은 도로에서만 만나는 것이 아니다. 삶이라는 여정길에는 미리 표지판 안내도 없이 휘어진 도로가 수없이 튀어나온다.
도로에서야 표지판이 알려주니 미리 마음의 준비라도 하거나 속력이라도 늦추어 보련만, 삶에서 갑작스럽게 만나는 곡선 도로는 당황스럽다. 미처 속도를 늦출 새도 없이 진입하면 영락없이 굴곡진 모서리에 부딪히고 만다. 부딪히면 속도는 자연스레 늦춰질 수밖에 없다.
그렇게 다르거나 비슷한 경험이 쌓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어디서 속도를 늦춰야 할지, 어디서 속도를 올려야 할지, 감이 온다. '삶의 슬로우 앤 퀵 감각'이 붙는 것이다.
이제는 운전할 때뿐 아니라 살아가면서도 이 감각을 느낀다. 여전히 얼마나 슬로우해야 할지, 얼마나 퀵 해야 할지는 미지수다. 그때그때 다르다. 그래도 이런 감각이 있어 앞으로 다가올지 모를 어떤 종류의 곡선 도로도 잘 타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60대 선생님께 배웠던 세 가지는 이것이다.
곡선 도로를 운전할 때는 슬로우 앤 퀵, 룰로 운전한다. : 굴곡진 삶에서도 마찬가지다.
호적에 한, 두 해 늦게 오르면 인생 후반부에 웃을 일이 생긴다. : 초반에 의도치 않는 방향으로 일이 진척되어 가도 인생은 새옹지마. 나중에 어떤 웃을 일로 돌아올지 모른다.
때로 착한 사람들이 승진의 기회를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 아등바등하지 말자. 살아보니 높은 자리에 올라갈 그릇이 아닌 사람들이 더 높이 오른 경우가 많더라.
이제 20대 때의 나보다 60대 때의 그 선생님에게 더 가까워지는 나이가 되고 보니 그때는 이해할 수 없었던, 온갖 미스터리했던 그분의 일들을 다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때 알려주셨던 삶의 지혜로 이리저리 부딪히면서도 그런대로 방향을 잡아가고 있다고, 궁금해하시며 꼬치꼬치 물어보셨던 그때 그 남자 친구와 결혼해서 여태껏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다고 안부인사나 전해드리고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