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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May 30. 2021

중3 딸이 엄마에게만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

20년 차 교사도 자식 교육은 어렵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서 자주 '벽창호'같은 사람이 나인 것 같다. 한 우물 안에서 20년 넘게 생활하다 보니 내가 속한 곳에서 보는 세상이 전부인 양 산다. 그러다 전혀 다른 세상을 마주하면 나의 인식 세계 밖의 일이라 본능적으로 밀어내곤 한다. 더는 안 엮일 사람, 나와는 거리가 먼 사건, 갈 일 없는 곳... 등 내 세상의 영역 밖으로 털어내어 버리는 것이다. '우물 안 개구리'라면 나의 좁은 시야를 탓하며 좀 더 큰 세계에 대한 동경이나 외경(畏敬)의 마음이니 개선의 여지라도 있겠지만, '벽창호'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고집 세고 완고하며 우둔하여 말이 도무지 통하지 않는 사람'과 무슨 일을 도모하고 싶겠나.


평소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식 문제에 대해서는 '우물 안 개구리'이자, 수시로 '벽창호'가 된다.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닌 아이를 두고 내가 아는 것이 전부인양 치부하고 확정 짓는 오류를 거듭하는 것이다. 한, 두 번 해야 실수지, 자주 한다면 나란 사람이 그런 모양의 사람이라는 뜻이라 더 껄적지근하다.


중3 딸의 담임 선생님과 학부모 상담을 했다. 당연히 전화 상담이었다. 등교라고 해야 일주일 나가면 2주 원격 수업이라 여태 등교한 날짜를 모두 합쳐 한 달도 채 안 되었다. 가뜩이나 딸의 학교는 겨울 방학부터 진행하던 공사로 신학기도 3월 말에 시작했다. 이러니 저러니 가뭄에 콩 나듯이 학교에 가는 아이들. 직장에 다니는 나 같은 엄마들은 서로 다른 학교를 다니는 중, 고생이 둘 이상 있으면 등교일이 헷갈려 알아서 다니겠거니, 맡겨둘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아이가 학교에 등교하지 않았다고 연락 온 적은 없으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다.

사정이 이러하니 5월 말이 되었는데도 딸은 새 친구들, 새 선생님과 실제 만난 횟수가 한 달도 채 안 된 거다. 아무리 담임 선생님이라 할지라도 어쩌다 한 번 만나는 반 학생에 대해 제대로 파악하기 힘드실 수밖에(중고등 학생들은 해당 과목 시간에만 만나게 될 테니) 없으실 테다.


딸의 담임 선생님과 상담을 하며 딸에 대해 또 새로운 정보를 듣게 되었다.  

선생님께서 첫 만남 이틀 째 날에 친구 알기 활동을 하셨단다. 내가 교사라는 사실을 모르셔서인지 빙고판에 반 학생들 정보를 주고 친구들 사이를 돌며 친구 찾기라는 활동을 하셨다고 놀이 방법에 대해 설명을 해 주셨다. 아, 예, 했지만 속으로는 '초2가 하는 활동을 중3도 하는군.' 하며 들었다. 친구들 정보를 알아내려면 돌아다니면서 부지런히 친구들의 정보를 캐내야 하는데 분주히 움직이는 아이들 틈에서 딸은 자리에 꿈쩍도 않고 앉아 있더라고 하셨다. 활동이 다 끝난 뒤 활동지를 다 걷었는데 딸은 결국 하지 않은 활동지를 제출하지 않았다고 하셨다.


순간 아뜩해졌다. 내가 아는(혹은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딸은 자신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에게 조금이라도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너무 조심해서 탈인 아이다. 눈에 띄는 행동은 가급적 하기 싫어하고, 학교 규칙이라면 절대적으로 지키려는 아이다(횡단보도를 조금 비켜 건너갔다가 딸에게 얼마나 혼났는지 모른다). 선생님의 말씀이라면 조금 마음에 안 들더라도 시늉이라도 할 아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내가 아는 모습과 다른 딸의 행동에 얕은 한숨이 절로 새어 나왔다.


왜 그랬을까. 새 선생님과 새 친구들 앞에서 다 같이 하는 활동에 혼자 앉아 있었다면 오히려 더 눈에 뜨였을 텐데. 오히려 더 불편한 상황일 수도 있었을 텐데...

유아기 때는 명절이면 친척들 앞에서 그간 갈고닦아 온(?) 댄스 실력을 발휘하고 초등학교 1, 2학년 때도 학예회 무대 공연에 누구보다 열심히 임하던 아이였는데. 이렇게 낯을 심하게 가리는 청소년이 되리라고는 상상해 보지도 못했다. 사춘기 청소년의 뇌는 '개벽'에 가까운 '개조'가 이루어지는 시기라는 것을 딸을 보며 실감한다.


언젠가 딸이 마침내 마스터했다며 내 앞에서 아이돌의 노래에 맞춰 흥겨운 춤사위를 보여주었었다. 유연하면서 엣지 있게 리듬을 타는 아이의 모습 혼자 보기 아까웠다.


"엄마가 영상 찍으면 안 돼? 진짜 혼자 보기 아깝다!"


했더니, 딸은 기겁을 했다. 찍었다간 난리 날 줄 알라는 딸의 엄포에 어쩔 수 없이 혼자만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도 마스터한 동작을 보여줄 때,


"그럼 뭐해? 다른 사람들은 너의 이런 모습, 꿈에도 모를 거잖아."


아쉬운 마음에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그럼 딸은,


"난 내가 이런 두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게 좋아."


하는 것이었다. 떠나온 지 너무 오래되어 기억에도 희미한 나의 사춘기, 그때의 나도 저랬을까, 생각해 본다. 나도 외부인이 아는 나와 내 가족이 아는 나, 를 달리 살고 싶어 했었던가. 그게 분리가 되기는 했던가.

도통 어른의 비논리적인 세계가 이해되지 않아 자주 화가 나 있었다. 그래서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재잘대다가도 집에만 오면 '진지 모드'로 바뀌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이 이중적인 자아를 갖고 싶어 하는 딸의 마음과 비슷했던 지점 인지도 모르겠다. 사춘기 시기에 대한 엄마의 공부는 아직도 멀었다.


딸이 중1, 1학기 상담 때 인적성 검사 결과 스트레스 지수가 높게 나왔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철렁 내려앉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남편과 의논한 끝에 온 가족이 딸이 좋아하는 배드민턴을 매주 하고 대화도 자주 나누면서 아이의 심리적인 부분을 살폈었다. 2학기 학부모 상담 때 아이의 표정과 학교 생활이 훨씬 밝아졌다는 선생님의 말씀을 듣고 조금은 안심했었는데, 너무 빨리 아이가 안정되었다고 섣부른 판단을 내렸던 것일까.


다행히 교직 경력이 많으신 듯한 담임 선생님께서는 딸이 가정에서 보이는 딴판(?) 모습을 들으시더니 아이와의 개별 상담 시 그런 부분을 일부러 말할 필요는 없겠다고 하셨다. 스스로 충만한 아이인 경우 외부 조건에 무조건 맞추려 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하시면서. 정말 스스로 충만하기 때문인지는 솔직히 모르겠다. 하지만 정말 하기 싫은 일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나 강요 때문에 하지는 말라고 평소에 얘기했었으니 내 걱정도 접어두기로 했다. 아이가 정말 불편한 일이 생기면 얘기할 테지. 아이보다 앞서 걱정하지 않기로 했지 않은가.


얼마 전 딸의 학교 중간고사 결과가 나왔다. 시험 직후 가채점 결과, 시험 본 3과목 중 두 과목이 백점이 나왔다고 어깨 뽕이 한껏 치솟길래, 정확한 성적표를 보고 나서 얘기하자고 했더랬다. 가채점과 같은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딸은 진짜 두 과목 백점 나왔다 핸드폰으로 소식을 알려왔다. 한껏 들떠 흥분을 주체하지 못하는 목소리로,


"엄마! 지금 당장 옆에 있는 선생님한테 자랑해!"


하는 거였다.


"그런 거 자랑하면 재수 없어해."


했더니, 그래도 무조건 하라는 거다.  혼자 보기 아까워 춤추는 모습 동영상 찍어 동료 선생님들께 자랑하고 싶다고 사정사정할 때는 죽어도 안 된다 하던 아이가 시험 결과는 자랑하라고 성화였다. 다른 사람에게 비추이고 싶은 딸의 욕구가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앞으로 시험은 계속될 것이고 좋지 않은 결과가 나오기도 할 텐데 저러다 성적에 휘둘릴까 걱정이 앞선다.


딸아이가 결과에 좌우되기보다 스스로 계획해 나아가는 과정에서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는,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갖기를 바란다. 좋은 결과를 받는다면 금상첨화다. 그렇지 못하더라도 스스로에 대한 믿음은 또 다음 기회에 도약할 힘을 보태줄 테니까. 삶은 계속 이어질 테고 어느 시점에서 최종 평가 결과지를 받아 들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니까.


부모는 우물 안에 있더라도 자식은 우물 밖 넓은 세상에 속하기를 바라는 마음. 가끔 벽창호 같은 엄마지만 딸이 자랑하고 싶어 하는 것이 딸의 마음도 살찌우는 일이기를 마음 모아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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