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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ul 10. 2021

딸, '점수'가 너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는단다


어느새 학기말이다. 초등 2학년 우리 반도 '논술형' 평가를 보는 주간이었으니 대한민국 어느 지역 어느 중, 고등학교나 기말고사 주간이었을 테다.

아무리 평가지에 점수를 써놓지 않더라도 아이들은 선다형 문항의 평가지를 받으면 맞은 개수를 파악하여 어떻게든 점수화시킨다. 100점 만점에 몇 점인지, 서로 비교하느라 정신이 없다. 평가지를 나눠주면서 다른 친구들과 비교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도 말짱 도루묵이다. 어떤 문제를 잘 모르고 있는가를 알기보다는, 옆 친구보다 내가 얼마나 더 맞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러다 10 문제도 안 되는 논술형 평가지 결과를 받아 든 아이들은 알쏭달쏭해진다. 100점 만점으로 환산하기도 어렵고 옆 친구와 비교해 봐도 딱히 내가 잘 한 건지 구분도 쉽지 않다. 논술형 평가지라 뭔가를 쓴 내용은 많은데 문제가 몇 개 안 되니, 다 맞았어도 5~6개. 과연 잘 맞은 건가? 20문제 단답형 문제 결과를 백점 만점으로 금방 환산하던 아이들 치고는 턱없이 셈이 둔해진다.


 앞으로도 얼마나 어렵고 큰 시험을 많이 마주하게 될 텐데, 초등학교 2학년 때부터 버겁게 하면 쓰나. 생각한답시고 교과서에서 배운 지문과 질문을 거의 그대로 평가지에 옮겨 놓아도 처음 본 것인 양 눈을 꿈뻑꿈뻑이는 아이들은 늘 있기 마련이다. 그러길래, 수업 시간에 '안드로메다'에 가 있지 말샘 말 잘 들으라고 그렇게 말했지 않니.


중3인 딸아이도 기말고사를 보았다. 뭣도 모르던 중1, 근자감(근거 없는 자신감)만 높았던 중2를 보내더니 딸은 이제야 정신이 좀 드는지, 공부 좀 해 보겠다며 의욕을 불태웠다. Better late than Never. 늦더라도 아예 안 하는 것보단 나은 법이다. 그래도 시험 기간이 코앞에 다가오기 전까지는 학원 선생님이 떠 먹여주는 공부에 익숙해진 요즘 아이들은 스스로 공부 페이스를 잡는 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공부는 학원에서 하니, 학원 외의 시간은 쉬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 정작 학원에서 하는 공부라는 것은 학원 선생님이 차려준 밥상 위에 놓인 숟가락만 들어 떠먹는 방식이니 언제 자기 주도 학습법이 생기랴.


내가 굳이 요청하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는데 학원에서는 아이가 학원에서 푼 문제에 대한 정답률을 자꾸 메시지로 보내준다. 아이의 학습 진행 상황을 점검하기 좋은 시스템이긴 하나, 몇 개 중 몇 개 맞았다는 것을 알고 나면 부모의 평정심은 흔들리기 마련이다. 몰랐다면 그냥 지나치고 넘어갔을 텐데.


딸아이는 기말고사 첫날에 본 수학 시험 난이도가 예상보다 높아 무척 당황했나 보다. 가채점 결과 전에 받아보지 못한 점수를 손에 드니 망연자실했던 모양이다. 딸은 근무 중인 내게 전화로 수학 시험 망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열심히 했는데도 점수가 안 나왔으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엄마의 말은 이 정도에서 끝냈어야 했다.

"그래서 몇 점이나 받은 건데?"

하지 않았으면 좋았을 말들은 꼭 그 말을 하고 난 뒤에야 알게 된다. 그때 그 말을 하지 말걸.


딸아이가 말하는 점수를 듣자, 열심히 했으면 된 거라던 엄마의 목소리는 자취를 감추고 침묵이 시작됐다. 본색이 드러난 것이다.

"···"

"엄마? 엄마...?"

 길어진 침묵이 통화 연결음 이상인가 싶어 확인하려던 딸이 내 목소리에서 달라진 온도차를 금방 눈치챘 모양이다. 나는 지나간 일은 빨리 잊고 다음 과목에 집중하라고 서둘러 무마하긴 했지만, 내심 찔리긴 했다.


퇴근길에 다시 걸려온 딸아이의 전화에서 딸은 다하지 못한 마음을 실토했다.


"엄마, 아까 나 엄마 전화 끊고 나서 집에 오는 내내 울었어."

"나도 처음 맞은 점수라 당황스러워서 엄마한테 위로받고 싶어 전화한 건데 엄마 목소리가 차가워서 서럽더라."


내 목소리만 전달된 게 다행이다 싶기도 했다. 그때 내 얼굴 표정까지 고스란히 마주했다면 딸의 서러움이 더 깊었을 테니 말이다.


"엄마 목소리가 그랬어? 그냥 잊고 다음 거에 집중하라는 뜻이었는데."


핑계를 대어 보았지만, 나도 모르게 튀어나와 버렸던 '못난 엄마의 습관'에 무색해졌다. '점수'란 놈은 아무리 굳게 먹은 마음도 일순간에 허물어버리는 '센' 녀석이다. 모르는 게 약일 때가 있는 법이다. 엄마 노릇도, 선생 노릇도 알면서 모르는 척, 해줄 때가 필요하다.


다음날 아침에서야 전날 딸아이가 전화했을 때 했어야 할 말을 할 수 있었다.


"딸, 점수가 너의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아."


그 말에 방긋 미소 짓는 딸을 보며 나는 속으로 되뇌며 다시 새겼다. '점수가 내 아이의 전부를 말해주지 않는다' '점수는 내 아이의 전부가 아니다'라고 말이다.


딸에게 꼭 말해주고 싶다.

딸, 너는 미래의 꿈에 대해 고민하는 진취적인 아이야. 너는 화가 나고 마음 상한 일이 있더라도 하룻밤 잠만 자고 나면 전날의 나쁜 마음은 꿀잠과 맞교환한 듯 회복탄력성이 큰 아이지. 너는 정의롭지 못한 일에 분개할 줄 아는 바른 생각을 가진 아이야. 너는 긍정적이고 밝은 에너지를 가진 아이이고. 무엇보다 너는 가족 중 가장 엄마를 안쓰러워하고 아껴주는 마음 좋은 딸이지.


이런 요소들은 네 시험지 어떤 문항에서도 평가해 주지 않는 너의 많은 것들이지. 엄마는 그걸 기억할게. 딸도 잊지 말아. 사는 데 있어서 시험 점수가 다는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야.

(근데 우리 딸 좋은 점 쓰다 보니 엄마 어릴 적 모습을 다시 보는 것 같은 이 기시감은 무엇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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