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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Nov 04. 2020

이기적인 큰것

퇴근 후 집에 돌아와 보니 싱크대에 점심 먹은 그릇이 없다.


아니, 이것들이 점심도 안 먹었단 말인가? 혹시나 애들 방 책상 위도 보고 컴퓨터 앞을 둘러봐도 점심밥 먹은 흔적을 찾지 못한다. 싱크대 안에 물컵 외에 밥그릇, 숟가락이 한 개도 없는 걸 보니 한 녀석만 안 먹은 것이 아니라 두 녀석 다 안 먹은 듯하다. 밥을 잘 안 먹어서 걱정이라는 다른 집 애들과는 달리 엄마만 보면 배고프다 노래를 부르고, 한 끼 숟가락 놓자마자 다음 끼니 메뉴를 묻는 녀석들이 밥을 안 먹었다는 건 우리 집에서는 '사건'이다.

아이들이 등교하지 않는 원격 수업일에는 점심이 제일 걱정이다. 우리 집 애들은 지가 지 정도는 전자레인지에 돌려먹을 정도로는 커서 그나마 다행인데, 그마저도 안 하다니, 뒷골이 당겨온다.


불똥은 학원에 가고 없는 중2 큰딸 아이에게 튄다. 누나가 되어 가지고 동생 밥도 안 챙기고 뭐하는 거람? 머릿속이 시끄러워진다. 저녁 준비가 끝날 무렵 학원 수업을 마치고 현관문에 들어서는 큰딸에게 점심 안 먹었냐고 물어보니, 모르겠단다. 그럼, 민성(가명)이는? 몰라, 한다. 뜨거운 것이 훅! 올라온다.

"너는 큰것이 되어서 동생 밥 먹은지도 모르냐!"

양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던지는 내 말투에는 가시가 잔뜩 돋아있다. 밥 안 먹은 것을 동생 안 챙긴 것으로 치환하여 타박한다는 점에서 다른 때 같으면 내가 어떻게 아냐고 쌍심지를 켰을 수도 있을 텐데, 오늘은 웬일로 "알았어~ 내일부터는 챙길게" 한다. 가시 돋친 말을 슬그머니 거둔다.

'큰것'에 대한 부담감을 안 주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또 그 말을 입에 올리고 말았다.




내가 중학교 3학년이었을 때, 고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치르는 학력고사가 남아있던 시절. 한창 고등학교 진학 상담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혼자 아이 셋을 힘들게 키우고 계시는 엄마는 큰딸인 내가 실업계 고등학교로 진학해서 빨리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를 바라셨다.

5남매 중 막내셨던 우리 엄마는 구정 설에는 나와 동생들을 꼭 큰 이모와 외삼촌댁에 들러 인사를 드리고 오게 했다. 지난겨울, 역시 새해 인사차 들렀을 때 큰 이모와 외삼촌들께서 덕담이라고 하신 말씀이, 고생하시는 엄마 생각해서 '큰것'인 가 빨리 취업을 하는 게 좋지 않겠니,였다.


어렸을 때부터 지겹게 들어왔던 말들, '큰것이 모범을 보여야 동생들도 뒤따른다.", "큰것이 잘 돼야 동생들도 잘된다.", "큰것이 돼서 왜 그렇게 너만 아느냐." 등등 '큰것'으로 시작하는 문장들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자라왔다. '큰것'인 나는 동생들의 모범이 되어야 했고, 더 열심히 살아야 했으며, 나만 아는 이기적인 선택을 하면 안 되었다.

정작 나는 '내가 잘 되어야 동생들도 잘된다'는 생각보다는 그냥 빨리 커서 나를 둘러싼 허울들을 다 벗어버리고 내 세계로 훌훌 떠나 독립적으로 살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주변 어른들 말씀이나 드라마, 옛날 소설 등에서 등장하는 맏이들, 특히 맏딸들은 왜 하나같이 자기 공부는 일찍 포기하고 동생들을 뒷바라지하다가 결혼 후에도 시댁 식구들에게 헌신하며 사는 것일까.


듣기 싫었다.

고생을 해도 우리 엄마가 하지, 내가 공부하겠다면 보태주지도 않을 양반들이 무슨 권리로 저런 말을 하는가. 나의 인생을 책임져 줄 사람들도 아니면서.

그래도 엄마는 마음에 걸렸다. 엄마가 고생하시는 것도 맞고, 내가 집안 형편 걱정할 줄 알아야 하는 '큰것'인 것도 맞다. 난 그래도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우리 집 형편에 전교 1~2등을 다툴 정도까지는 아닌데도 공부를 계속하겠다고 고집하는 건 나만 생각하는 이기심이 분명해 보였다. 그래도 그때는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지 않으면 왠지 내 삶이 피워보지 못하고 져버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다른 길로 들어서면 다시는 내가 살고 싶은 삶을 살아보지 못할 것 같은 조급함이 앞섰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때는 다른 방법을 생각할 수 없었다. 앞으로의 내 삶에 영향을 줄 두 가지 갈래길 중 한 가지를 선택하기에는 아직 어린 나이었다.


난 타고나기를 그렇게 이타적인 인간이 아닐뿐더러, 멀티태스킹형 인간도 아니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동생들을 뒷바라지까지 할 수 있는 인간은 못되었다. 그래서 그냥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았다. 다행스럽게도 내가 하고 싶던 방식이 어른들의 기대에 크게 벗어나지 않아서 큰 마찰 없이 지나왔던 것뿐이었다.


결국 난 중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께 나를 인문계 고등학교로 진학하도록 엄마를 설득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당시 나의 담임 선생님은 없는 형편에 성실하고 열심히 하려는 의지를 예쁘게 봐주시는 분이셔서 나를 추천해 장학금도 받게 해 주셨던 고마운 분이셨다. 그 선생님의 설득으로 나는 없는 형편에 혼자 대학 가겠다고 인문계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기적인 큰것'이 되었다. 그해 겨울, 난 우리 반 최고점 학력고사 점수를 받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첫째 딸로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지만>이라는 책에서 첫째 딸들은 친부모에게서 나온 다른 형제자매들보다도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다른 부모의 첫째 딸들과 더 많은 부분에서 유사하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다. 내가 그렇게 듣기 싫어했던 '큰것'이라는 말이 나의 큰딸에게 어떻게 가 닿았을지 예상되는 바다.

마음에 여유가 없어지면 듣고 자라온 대로 말과 행동이 나온다. 큰딸에게 '큰것'의 굴레를 씌우고 싶지 않은 이유다.


살아가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큰것'의 타이틀이 제일 앞서서 딸의 결정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딸이 '큰것'이서 하고 싶어도 미뤘던 것들, 아예 생각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눌렀던 것들, 누가 뭐라 한 것도 아닌데 미안하고 죄스러웠던 감정들, 그런 것에서 놓여나 그냥 온전한 '나'로 살아가기를 바란다.


딸, '이기적인 큰것'이어도 돼. 엄마도 이제는 맘껏 그렇게 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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