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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Jun 30. 2021

설사가 인싸 된 날


우리 반 아이들과 국어 시간에 꾸며주는 문장 만들기 놀이를 했다. 단원 내내 꾸며주는 말을 어떻게 활용할지 배우고 연습을 했으니 문장 만들기 놀이로 마무리를 하는 시간이었다. 한 아이가 꾸며주는 말이 들어간 한 문장을 시작하면 다른 학생이 그 문장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문장을 만들어야 한다. 꾸며주는 말이 들어가야 하는 건 기본이다. 전체가 그렇게 문장과 문장을 연결하여 하나의 짧은 이야기를 만드는 것이다.


재령이(가명)가 첫 문장을 시작해 주었다.

"아침에 맛있는 비빔밥을 먹었다."

이후 아이들은 손을 들어 이야기를 연결해 나갔다.

"밥을 먹고 후다닥 뛰어서 학교에 갔다."

"달려가면서 지각할까 봐 좀 걱정이 되었다."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다행히 지각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아이들의 꾸며주는 말을 넣어 이어 말하는 솜씨는 만족스러웠다.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문장을 만들기 전, 폭력적이거나 너무 과하거나, 나쁜 말을 사용하지 않도록 주의를 주고 시작했더니 아이들이 너무 바른(?) 내용으로 이야기를 전개하는 것 같았다. 꾸며주는 말도 잘 넣었고 이야기 흐름도 자연스러운데 '재미'가 없었다. 가뜩이나 훌륭한 이야기만 배우는 국어 시간에 창의적으로 만드는 이야기까지 이렇게 정갈할 필요는 없. 수업의 MSG가 필요한 타임이다.


"얘들아, 선생님도 문장 하나 만들게."


아이들의 눈빛이 순간 반짝인다. 교실 안에 흐르던 공기의 흐름이 일순 멈춘다. 선생님이 어떤 문장을 만드실까, 기대에 찬 아이들의 눈이 초롱초롱 빛난다. 아이들이 만든 이야기와 자연스럽게 이어지면서 좀 더 흥미로운 방향으로 전환시킬 한 문장, 그게 필요했다.


저학년 아이들에게 결코 실패하지 않는 이야기 소재가 있다. 누군가는 이미 생각났을 것이다. 맞다. '똥'이다. '똥' 이야기는 일순 아이들의 관심을 끌고 웃음보를 터트릴 수 있는 소재다. 하지만 선생님 입을 통해 일단 발설이 되면 흥미를 유지하는 유효 시간이 길지 않다. 아이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게 발화되어 나오게 해야 한다. 아이들의 집중 시간을 늘리면서 '똥'에 대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하나의 문장, 어떤 게 좋을까?


학교에 도착하고 보니 지각하지 않았다는 문장으로 끝났으렷다. 그럼, 다음 문장은 이게 좋겠다.


"자리에 앉아 조금 지나자 갑자기 배에서 꾸르르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눈치 빠른 아이들은 나의 문장에서 '꾸르르르륵'이라는 흉내 내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이미 간파했다. 선생님이 왜 이 소리를 일부러 강조하는지도 알아차렸다. 웃음기 가득한 채 가늘어진 눈들이 몇몇 보였다. 다음 문장을 이어 말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의 손짓이 간절해졌다.

그중, 눈가에 웃음기가 만연한 민이(가명)의 문장이 궁금했다. 평소에 재치가 넘치는 아이다.


"화장실로 후다닥 달려가니 설사가 나왔는데 옆 화장실에서 우리 반 친구가 그 소리를 들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이들은 "꺅~!" 소리를 질러댔다. 아무리 만들어낸 이야기일지라도 갑작스러운 배변 소식을 친구가 안다는 것은 아무래도 대략 난감한 일이다. 이미 아이들은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었다. 다른 아이가 만든 다음 문장에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하는 사람은 이제 나뿐이었다.


"그 친구가 교실에 가더니 다른 애들한테 내가 설사했다고 막 소문을 냈다."


아이고야, 이젠 수습하긴 글렀다. 이 일을 어찌한담. 이 상황을 수습할 수사반장급 문장이 필요했다. 일을 크게 벌린 장본인은 나이니 이쯤에서 마무리를 해야 하는 것인가. 그 순간, 우리 반 병이(가명)가 손을 들었다.


"친구들이 이 말을 듣고 모두 내 얘기를 했다. 그래서 나는 '인싸'가 되었다."


반 전체 아이들의 웃음보가 일제히 터졌다.

이 사태를 이렇게 깔끔하게 한 문장으로 수습하다니. 2학년 아이의 창의성에 놀라는 일이 많지만, 이렇게까지 기발할 줄이야. 하늘이 병민이의 입을 통해 황금 문장을 내려주었으니, 꾸며주는 문장으로 만드는 이야기는 그쯤에서 아름답게(?) 마무리했다.

그래도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에 제목이 없다면 좀 서운하다. 아이들에게 우리 모두가 함께 만든 이 멋진 이야기에 제목을 붙여 보자고 했다. 앞다퉈 손을 들어 발표한 아이들의 제목은 이러했다.


<내가 가장 행복 날>

<설사가 자랑이 될 줄이야>

<내 인생 최고의 설사>

<설사가 인싸 된 날>

.

.


기발하고 재미난 제목이 더 있었는데... 기억력의 한계다. 아이들과 배꼽 빠지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국어 시간. 아이들이 더 했으면 좋겠다는 국어 시간이라니. 역시 아이들에게 '똥'은 최고의 이야기 소재다.

아, 네가 선생님을 살려주었구나. 길이길이 기억할게. 고마워!



p.s. 누군가의 발언을 문제 삼아 물고 뜯는 게 어른들 세상이다. 2학년 아이들도 당황스러운 말을 기발하게 전환하여 모두에게 웃음 바이러스를 퍼뜨릴 줄 안다.

2학년 아이들의 말솜씨에도 따라가지 못하는 어른들의 단속하지 못하는 말이란 참으로 경박스럽다. 나이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더니, 입을 닫아 주었으면 싶은 어른들의 말이 아이들의 귀에까지 들릴까 봐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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