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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월의 마지막 날에

by 정혜영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노래 제목을 맘대로 뒤죽박죽 섞어 기억하는 제게 이 노래는 '시월의 마지막 밤'인 줄 착각하고 있었던 노래입니다. 알고 보니 가수 이용(이분 아시면 세대 나옵니다)의 '잊혀진 계절'이네요. 위 가사는 이 노래의부분입니다.


가을바람이 제법 찬 기운 드는 시월의 마지막 날 헤어지는 연인의 마음은 무척 스산하겠네요. 그러니 노래 전체에 슬픔과 안타까움의 정서가 가득한 것이겠지요. 우리 세대는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헤어지는 날로, 우리 2세들은 핼러윈데이로 알고 있는 10월의 마지막 날이 우리 부부에겐 결혼기념일이랍니다. 만우절이라면 못 믿을 사람 여럿이겠지요.


가진 것 없이 만나 자식을 둘이나 두었으니 이만하면 부자입니다. 지지고 볶는 <사랑과 전쟁>을 치르며 살다 보니 이제는 서로의 자리를 존중할 줄도 알게 되었으니(끝이 없는 과정이긴 합니다만,) 이만하면 어른스럽다 하겠습니다. 처음 만나 손 끝만 닿아도 파르르 떨리던 그때 그 심장 떨리던 감정은 아, 옛날이여~ 가 된 지 오래지만, 이제는 서로가 함께 쌓아 올린 20여 년이라는 시간의 탑이 비바람에 흔들리지 않도록 견고히 할 때라 생각합니다.


결혼기념일 축하 기념으로 딸과 아들이 만들어준 케이크와 쿠키에 우리 부부는 더욱 단단히 살아야 할 압박(?)을 받네요. 엄마, 아빠, 검은 머리 파뿌리가 되도록 살아야만 해요. 하는 무언의 압력. 엄마, 아빠가 결혼반지를 안 끼고 다니니 만들었다는 딸아이의 커플 비즈 반지로 우리 부부는 한 번 더 결혼 서약을 해야만 했다죠. 자식 때문에라도 강제로 충실한 부모가 되어야 한다고, 우리 부부는 또 한 번 비자발인 어른이 되었답니다.

딸, 아들이 만든 쿠키와 케이크, 딸이 만들어 준 엄마 아빠의 비즈 반지 by 그루잠




결혼기념일이라고 매주 하던 루틴을 거스를 수는 없습니다. 단풍철이어서 늦게 갔다가는 주차장이 만차 되어 낭패거든요. 남편이 기상하지 않은 시간에 서둘러 집을 나와 북한산 원효봉에 올랐어요.

산은 일주일 만에 완전히 다른 옷을 입었더라구요. 지난주엔 알록달록 물든 단풍나무를 만나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랐는데 오늘은 오색 단풍이 온 산에 흐드러졌어요. 이제 사진 찍을 스팟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아무 데나 찍기만 하면 다 작품이 되더군요.


눈호강 하세요~^^ by 그루잠


울긋불긋한 가을 산의 단풍을 가까이 보니 같은 색이 거의 없었어요. 단풍나무는 붉게만 물드는 줄 알았는데 은행나무처럼 노란 단풍, 주황색, 갈색 단풍도 있었어요. 나무가 나고 자란 자리에서 받은 햇빛과 물, 양분에 따라 나뭇잎의 색깔은 서로 다른 빛을 내어놓았어요.

정직한 나무는 자신이 받고 자란 대로 내어 놓습니다. 같은 종류의 나무라도 다른 색깔로 물이 듭니다. 서로 다른 색으로 물들어 어우러져서 가을 산은 더욱 빛납니다.


서로 다른 색을 내며 조화롭게 아름다울 수 있는 세상. 다양한 색깔을 존중하는 세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서로 다른 별이 다른 강도로 반짝이니 밤하늘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겠지요.


시월의 마지막 날. 모두가 자신의 자리에서 각자의 별로 빛나길 바라는 마음 전합니다.


시월의 마지막 날에 그루잠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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