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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Nov 10. 2020

<당신이 옳다>

정혜신의 적정 심리학

정혜신의 적정 심리학, <당신이 옳다> 책을 처음 잡았을 때는 책의 두께상 조금은 빨리 읽어낼 수 있으리라, 이론 위주의 책은 아니라는 귀동냥 서평도 있어서 편하게 읽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웬걸,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전 열 장도 안 되는 프롤로그를 읽는 동안부터 벌써 가슴이 먹먹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는 게, 아, 이번엔 다른 양상으로 읽어내는 시간이 길어지겠구나, 싶은 예감이 들었다.


작가는 프롤로그에서 한때 프로이트의 심리학에 심취했던, 잘 나가던 심리학자가 전문적인 자격증을 가지고 진료실 안에서 '환자'들을 치료하면서도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불안과 혼돈에서 방황했었노라고 고백한다. 작가는 그때를,

'청소를 끝내지 않은 더러움을 이불로 덮어놓은 것 같은 외면의 시간 속'

으로 비유한다. 삶을 살아내면서 그런 표현을 쓸만한 순간들이 없는 사람들이 있을까. 작가는 진료실이 아닌 현장에서 ‘사람’들을 만나면서 방황의 원인을 알아냈다고 한다. ‘진료실 밖’에서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들이 ‘진료실 안’에서 만났다면 ‘환자’라고 결론 내릴 만한 사람들이었다고. ‘진료실’이라는 공간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을 ‘환자’와 이를 치료해 주는 ‘의사’라는 영역으로 구분 짓고 그러한 구분으로 역할과 권력관계가 생기면서 ‘진정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았노라고.




그런 점에서 학교 '교실' 안에서 만나는 '학생'과 '교사'로서의 만남도 그 역할을 나누고 일정한 영역을 가진다는 점에서 일종의 권력관계가 생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되돌아보면 모든 것이 부끄러운 시행착오의 연속이었던 초임 교사 시절을 지나 이제는 웬만한 일에는 스스로 자제력도 생기고 기다려 줄줄 아는 여유도 생겼다는 생각이 들다가도, 어느 지점에서는 여전히 받아들이기 힘든 부분이 있다. 그때가 언제인가 생각해보면, 학생들이나 학부모가 무례하게 행동하거나 말할 때이다. 그 상황에서는 그들의 말과 행동이 나의 경계선을 함부로 넘어선다는 생각에 본능적인 방어기제가 작동하게 되는 것 같다.


나를 보호해야 한다는 본능이 작동하면, 상대가 왜 그런 말과 행동을 하게 되었는지 들여다볼 여유가 생기지 않는다. '너도 있지만 나도 있다'며 나를 보호할 수 있어야 타인을 품을 수 있다고 작가는 말하지만, 그처럼 본능적으로 나를 보호한 날엔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 하는 내 안의 자존과 싸우게 된다.




책 속에는 작가가 만난 고통의 늪에 빠진 많은 이들의 이야기와 그 과정에서 저자가 치유자로서 그들에게 다가갔던 과정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사례 하나하나마다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픈데, 어떻게 그 안에서 그들과 눈을 맞추고 감정을 함께 실어갈 수 있는지, 충조평판하지 않으며 끝까지 마음을 보태는 그 공감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다.


여러 사례들 중 나는 엄마의 입장이다 보니 자녀와의 갈등 이야기가 마음에 더 와 닿았다.


자기 존재가 집중받고 주목받은 사람은 설명할 수 없는 안정감을 확보한다.
그 안정감 속에서야 비로소 사람은 합리적인 사고가 가능하다.


이 부분에서 예전 한창 사춘기를 통과 중이었던 중2 딸과의 일이 떠올랐다.


직장맘들이 모두 그러하듯 일로부터 벗어나고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던 금요일 저녁, 아이가 다니는 학원 선생님과의 연락 약속을 깜빡 잊어버리고 말았다. 약속한 시간에서 10분 정도 지났을 때 불현듯 생각이 났고, 성급한 마음에 마찬가지로 일주일 간의 학교와 학원 수업에서 잠시 놓여나 컴퓨터 게임을 즐기고 있던 아이에게 "너의 일이니 네가 챙겨야지, 엄마가 다 어떻게 챙기냐."며 다그치게 되었다.

아이는 "나도 알고는 있었다. 엄마도 잊은 것 아니냐, 나도 잠깐 잊어버렸을 뿐이다. 왜 내가 생각도 없는 사람 취급하느냐."며 반항기 가득한 여느 사춘기 정점의 아이의 눈빛과 말투로 받아쳤다.


일의 발단이 된 이유는 사라지고 그렇게 서로에게 보인 말과 행동에 대한 불만으로 한동안 아이와 격렬한 언쟁을 벌였고, 종국에 나는 '엄마'의 권위로 '딸'인 네가 그렇게 무례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딸의 인격을 건드리는 말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이의 자아를 공격하는 못난 엄마가 되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나, 울고 있는 딸아이 앞에서 난 아이에게 아무것도 물어보지 않고 내 말만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정신이 들었을 때 난 아이에게 다시 천천히 묻기 시작했다.

"왜 그런 거니?", "그렇게 말할 때 어떤 생각으로 그런 거니?" 다음에 이런 일이 또 생겼을 때 엄마는 또 너와 이런 상황을 만들고 싶지 않다, 그래서 이런 상황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싶다, 고.

그러자 아이는 생각지도 못한 말을 줄줄이 토해냈다.


엄마가 갑자기 다그칠 때면, 초등학교 1, 2학년 때 뭘 잘못했는지도 모르고 엄마에게 야단맞았던 때가 순간 떠오른다고, 그때 이유도 모른 채 아무 말도 못 하고 야단맞았던 자신이 떠오른다고, 그런 자기가 너무 불쌍해서 이제 그런 일이 생기면 가만히만 있지 않겠다고 다짐한다고.

그런 생각들이 순간 떠오른다는 것이다. 깜짝 놀랐다. 생각지도 못한 말들이었다. 아이가 더 어렸을 때 잘못한 일에 대해 단호하게 대해야 아이를 바르게 키우는 엄마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아이에게 트라우마를 남긴 장본인이 엄마인 나라니.


아이에게 사과했다. 엄마가 처음이라 몰랐다고, 그땐 그게 맞는 일인 줄 알았다고, 잘못된 행동을 고쳐줘야 한다는 생각에서 한 행동이었지만, 그건 잘못된 방법이었다고, 어른이라고 다 옳은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엄마에게 말하기 어려웠을 텐데 말해줘서 고맙다고, 엄마가 잘못한 거라고, 네 잘못이 아니라고.


딸의 손을 잡고 온 마음을 다해 사과했다.

딸아이도, 평소에는 엄마에게 그런 생각 들지 않는다, 그럴 때만 억울한 순간을 떠올리며 엄마에게 무례하게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이 이기적으로 느껴진다, 그러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그렇게 된다며 남아있는 자신의 속 이야기를 숨김없이 들려주었다.


그 시간 내내 딸과 맞잡은 손과 흐르는 눈물에 뜨거운 것을 느끼며 서로를 보듬었던 시간이었다. 아이에게 묻기 시작하니 아이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말 궁금해서 물었더니 생긴 기적 같은 반응이었다.


정말 궁금하면 물어보는 사람의 어투와 표정, 몸짓에도 그 진심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아이는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마음을 움직였던 것 같다. 엄마로 지내온 세월이 짧지 않은데 아직도 미숙하기만 한 엄마라서 미안하다.


"얘는 딱 자기 아빠야, 얘는 딱 어릴 적 나야, 얘는 나랑 정반대야"와 같은 말들은 내 아이를 부모와의 연결 속에서만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나와 '내가 아닌 너'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의 언어다. 자식을 바라보는 게으른 시선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이런 게으른 시각은 큰 둑의 작은 구멍이다. 결국 둑 전체를 무너뜨린다. (p.200)
타인을 공감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이유는 공감까지 가는 길 굽이굽이마다 자신을 만나야 하는 숙제들이 숨어 있기 때문이다. (p.245)
부모인 내가 자식을 사랑했다고 해서 사랑이 아니라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아이가 느껴야 사랑이다. (p.287)


모든 엄마, 아빠들에게 일침을 놓는 말들이다. 둑 전체를 무너뜨리지 않도록 도와준 딸아이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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