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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Nov 08. 2020

젊은 날의 초상, <데미안>

때로는 읽지 않았으면서도 어디선가 하도 많이 들어서, 익숙해져 버린, 그런 책들이 있다.

내게는 <데미안>이 그런 책 중 하나였다. 제목이 너무 익숙하고 내용도 어디선가 소개된 것들, 인용된 글귀 등을 통해 접해 본 적이 많아서 손에 잡아 읽는다는 것은 너무 새삼스러운 일이 되는, 그런 느낌 말이다.

전에 한 번 딸아이가 읽었으면 좋겠다고 툭 던져놓았다가 훑어보긴 했는데 청소년용 문고로 나온 책이라 담겨있는 디테일이 많이 빠져서 그런가, 아쉬운 부분이 많아 원본을 다시 사서 읽어 보았다. 


1919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 디자인으로 제작된 초판본 데미안의 겉표지는 당시 제작방식에 따라 천으로 표지를 싸서 제작된 디자인이다. 항상 반들반들한 책 표지만 접하다가 천이 주는 독특한 질감으로 읽는 내내 책에 닿는 느낌이 좋았다. 헤르만 헤세가 초판본을 발행할 당시, 책의 주인공 이름인 '에밀 싱클레어'를 작자명으로 하여 발간했다고 한다. 실제로 표지 제목 아래 저자명이 '에밀 싱클레어'라고 되어 있다. 


옮긴이의 말에 의하면, 당시 이미 널리 알려진 유명 작가였던 헤르만 헤세가 오롯이 작품으로만 평가받고 싶은 마음에 본인의 이름을 넣지 않았다고 하지만, 다른 정보에 따르면, 당시 1차 세계대전에 공공연하게 반대 입장을 취해왔던 헤세에게 비난의 화살이 쏟아져서 자신의 이름으로 출판을 하기 어려워 다른 필명을 쓴 것이라고도 한다.





남부러울 것 없어 보이는 중상류층 가정의 막내아들이었던 싱클레어에게는 두 개의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평온하며 따뜻하고 안락한, 질서와 규율이 있는, 부모와 누이들이 함께 하는 세계이다. 다른 하나는 집 안에서 일하는 일손들과 싱클레어를 둘러싼 집 밖의 세계로, 귀신 이야기, 추문, 술주정, 각종 범죄가 상시로 발생하는 악취 나는 세계다. 싱클레어는 안락한 집 안에서의 세상에서 안정을 느끼지만 바깥의 세상에 강한 호기심을 지니며 살아가는 10살 소년이다.


금지된 것에 대한 강한 이끌림은 인간의 본능인지, 바깥세상에 대한 동경과 호기심에 차 있던 싱클레어는 주정뱅이 양복점장이의 아들인 '프란츠 크로머'와의 만남에서 어처구니없는 거짓말로 헤어날 수 없는 악의 세계를 처음 접하게 된다.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극복하기에 어려운 끊임없는 문제에 갇혀있으면서도 싱클레어는 부모에게도, 다른 주변인에게도 도움을 청하지 않은 채 스스로를 옭아맨 힘의 논리에 갇혀 괴로워한다. 

그러던 중, 운명의 친구 '데미안'을 만나고 데미안의 도움으로 영원히 이어질 듯 지긋지긋했던 프란츠 크로머와의 관계가 단절되자, 싱클레어는 자신이 속해 있던 안전한 세계로 더 천착하게 된다. 그렇게 데미안과의 거리도 멀어지게 된다.


싱클레어는 김나지움(독일의 전통적 중등 교육기관, 9년제, 졸업 후 대학 진학)에 진학한 후 방탕한 세계에 빠져들면서, 결국 학교로부터 강력한 제적 경고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는데, 이때 공원에서 마주한 한 소녀에게서 데미안의 얼굴을 본다.

싱클레어는 꿈속에서 본 새의 모습을 그려 데미안에게 보내는데 이 그림에 대한 데미안의 답장에서 너무나도 유명해 누구나 알고 있는, 그 문구가 나온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새는 신에게 날아간다. 
신의 이름은 아브락사스다. 


신성과 악마성을 결합하는 역할을 하는 상징적인 신적 존재인 '아브락사스'에 대해 접한 이후, 싱클레어는 데미안이 말한 비판적인 사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쾌감과 공포, 남성과 여성의 혼합, 성스러움과 충격의 뒤섞임, 연약한 순결을 관통하는 깊은 죄악. 싱클레어에게 사랑과 꿈, 아브락사스의 이미지는 이런 것이다.

그 이후 만나게 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되려다 만 교회 오르간 연주자, 피스토리우스와 싱클레어를 동경해 영감을 얻고 싶어 하던 자살 미수자, 크나우어와의 교분은 '나'를 찾아가던 싱클레어에게 큰 영향을 준다.


싱클레어는 데미안의 어머니이자 영원의 여성인 에바 부인에게서 그가 그토록 갈구해 오던 자신의 길을 향하는 구도와 무의식 속의 열망이 현실화된 이미지를 본다. 독일어로 '에바'는 영어의 '이브'라고 하니 사람들이 그녀를 에바 부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은 인간 본성이 향하는 모태 모성에 대한 갈구이지 않나 싶다. 싱클레어 또한 그녀에게서 존재에 대한 위안과 깊은 연대의식을 느낀다. 


에바 부인에 대한 열망의 응답은 예상치 못한 것으로 나타난다. 

전쟁이 터졌고 싱클레어는 자신이 내면의 길을 찾아오는 과정에서 중시 여기지 않던 사람들이 자신의 이득을 떠나 대단히 품위 있게 운명의 의지에 접근하는 것을 보고 자신이 사람들을 과소평가했음을 깨닫는다. 


싱클레어는 전쟁 중 치명상을 입고 병원에 있던 중 마지막으로 데미안을 만나게 되고, 데미안은 에바 부인의 입맞춤을 대신 전해 준다. 그 입맞춤은 자아를 찾아가는 모든 구도자들과 개혁을 꿈꾸는 자들의 동맹에 속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내는 입맞춤이었다. 





<데미안>이 당시 유럽의 청년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이유를 알 것 같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개인과 존재의 의미에 대해 고민하던 유럽 청년들에게 싱클레어는 바로 자신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자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좌절하고 분노하다 열망의 대상을 만나면 희열에 차 오르는 젊음, '싱클레어의 시기'에는 자신을 진정한 자신으로 이끌어줄 '데미안'이나 '에바 부인'과 같은 존재를 갈망하기 마련이다.

에바 부인은 그 과정에서 힘겨워하는 모든 '싱클레어들'에게 묻는다.


돌이켜 자신에게 물어보세요. 
대체 그 길은 그렇게도 어려웠던가? 
그저 어렵기만 했던가? 
아름답기도 하지 않았는가? 
당신은 보다 더 아름답고 더 쉬운 길을 알고 있나요? 


자신을 완성한 종착역이 아닌, 자신의 내면을 찾아가는 험난한 그 '과정'의 의미를 부각 시켜주는 에바 부인의 질문은 고통스러워하던 젊은이들의 머리를 쓸어주고 어깨를 끌어안아주며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주었을 것이다. 


살아가는 길이 아픔의 연속일 수 있지만 그렇게 가다 보면 언젠가는 자신의 열쇠를 찾게 되고, 자신의 내면을 만나게 될 거라는, 그들이 닿고 싶어 하는 완전한 친구이자, 인도자인 데미안과 같은 모습의 자신을 발견하게 될 거라는, 이야기의 끝맺음은 시대를 떠나 존재에 대해 한 번쯤 고민해봤을 모든 이들에게 보내는 위로이자 격려일 것이다. 


헤세가 이 작품을 쓰던 나이보다 조금 더 살아보니 헤세가 지나온 자신의 젊은 날에게 어떤 마음이었을지 느껴진다. 나 역시 그 시절이 너무 힘겨웠던 기억에 다시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 시절이 참 아름다웠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힘들었던 기억이 희미해지면 아름다웠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질까? 다시 돌아가면 난 다른 길을 찾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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