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젊은 세대들에게는 일자리를 바꾸어 몸값을 올리는 게 상식이라고 한다. 직업 변동률이 대체로 낮은 교사 집단에서도 교사들이 '탈출은 지능순'이라는 말을 종종 농담처럼 하는 걸 보면 한 직장에서 오래 몸 담는 일마저 이제는 옛날 사고방식인가, 싶어 뒷맛이 씁쓸하다.
그런데 한 직장에서 20년이 넘게 근속하고 있는 내 친구들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우리들의 사고방식이 고루하다는 인상을 전혀 받지 못한다. 각자의 자리에서 오랜 기간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가며 같은 일을 지속하면서도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들을 끝없이 돌보는 사람들을 보면 그게 내 친구라 해도 무한 존경스럽다.
가족과 친족을 돌보며 바쁜 5월을 보낸 우리에게도 위로의 날이 필요하다. 30년 지기 친구들 넷이 하루로는 부족하다 싶어 1박 2일 모임을 잡았다. 같은 여고 동창, 오랜 직장 생활자, 어느 정도 성장한 자녀들을 둔 육아 경력맘이라는 많은 공통점 때문인지 오랜만에 만나도 매번 할 얘기가 넘쳐났다. 넷 중 두 친구들이 지방에서 올라와야 하기 때문에 하루 일정은 너무 빠듯하여 모임 때마다 1박 2일 일정으로 만나다 보니 여고 시절보다 더 깊게 서로를 다시 알아가는 재미도 쏠쏠했다. "너, 이런 애였어?" 할 때마다 너도 웃고 나도 웃는다.
우리가 졸업한 여고 이름이 '0신'이었어서 난 우리 모임의 이름을 라임을 살려 '0신 여신'이라 지어버렸다. 50 먹은 중년 여성들에게 '여신'이라니 남들이 콧웃음을 칠 일이지만, 어떠랴. 그들에게 그렇게 불러달라는 것도 아니고 우리끼리라도 그렇게 불러보겠다는데.
이번엔 이 여신들과 함께 새로운 분위기로 만나고 싶어 글램핑장을 예약했다. 몇 달 전에 우리 가족과 모처럼 글램핑을 다녀왔더니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불멍을 하는 맛이 기대 이상이어서 이번엔 그렇게 계획을 잡았다.
가족의 달, 5월이어서인지 적당한 글램핑장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였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두 친구가 내 주소지 가까운 KTX 열차역으로 오면 내가 픽업해서 글램핑 장소로 이동하기로 계획되어 있었다. 멀리서 오는 친구들의 이동 거리를 고려하면 친구들이 도착한 후 다시 먼 거리를 이동하게 할 수는 없었다. 비교적 가까운 곳에 예약 가능한 곳이 있었지만 가격이 좀 세서 고민이 되었다. 모임 회비로 지출할 예정이었지만 직업인이기 이전에 주부이기도 한 우리라 과소비에 대한 기본적인 원죄 의식이 발동했다. 그런데, "야! 우리가 1년에 몇 번을 만난다고. 그냥 좋은 데 가자!"라는 한 친구의 깔끔한 정리 덕에 숙소를 결정할 수 있었다. 역시 일을 성사시키는 데는 과감한 결정이 답이다.
이 친구들은 다들 한 직장에서 20년 이상의 경력을 가졌다. 직종도 다양해서 법원직 공무원, 컴퓨터학과 부교수, 굴지의 자동차 회사 과장이다(이 지점에서 다시 확실히 해 두자면, 모두 50세 여자들이다). 친구들이 20년 이상 한 가지 분야의 일에 종사하며 처음 입사했을 때와는 다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고군분투했을지 상상이 되는가. 여자들이 많은 직종인 내 직업(초등교사)에 비하면 그 친구들이 종사하는 분야엔 남자들의 비율이 상대적으로 많다. 직업 선택이 자유로운 지금도 한쪽 성의 비율이 높은 직군에서 다른 성을 가진 이들이 겪는 직장생활의 애로를 다 헤아리기 어려운데 이들이 처음 입사했던 20여 년 전엔 얼마나 고초가 많았을까.
정글 같은 직장생활 속에서 버티며 굳어지고 단단해졌을 법도 하건만, 우리들은 여전히 친구들을 만나면 여고 시절 소녀가 된다. 그러다 어느 정도 큰 자녀들의 진로 문제가 나오면 한숨으로 대동단결한다. 그나마 약간 여유로운 경지에 오른 분야라면 긴 직장생활 못지않은 사랑과 전쟁의 긴(?) 결혼 생활을 견디며 가사와 육아의 전장에서 전우애로 다져진 남편과의 관계랄까(음... 이젠형제나 다름없으니까).
우리 넷 중 셋은 원가정이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하여 학창 시절에는 학업 지속 여부조차 위협을 받았었다. 남은 한 친구도 그리 넉넉진 않았지만 대학을 포기할 위협에 처하지 않았었단 사실만으로도 부르주아 취급을 받았으니, 우리 삶의 영사기를 돌려보다 보면 자주 울컥해질 것이다. 이런 우리들이 남자들도 몇 번씩 옮기고 바꾸는 직장을 어떻게 20년 이상 유지할 수 있었던 걸까.
친구들은 손사래를 칠지도 모르지만, 이 친구들은 기본적으로 한 번 시작한 일을 끝까지 해내는 삶의 자세를 가졌다. 그 분야에 특별한 재능이 있어서라기보다는 시작한 일에 인내와 끈기로 버티고 조금씩 성장을 도모하는 태도가 닮았다. 사람의 성정이나 태도는 한 가지에서 발화하고 끝나는 일이 아니므로 가정이나 인간관계에서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20년 이상 가사와 육아, 일을 병행하는 길이 어찌 꽃길이기만 했을까.
20년 이상 한 분야의 경력을 쌓아오며 더 높은 자리에 오르고도 남았을 내 친구들이 여전히 견고한 유리천장을 뚫기에 부족한 몇 퍼센트가 무엇일까, 생각해 본다. 그것이 오로지 우리 스스로가 가진 부족한 재능, 열정이라면 난 조금 덜 서글프겠다. 타인에 대한 한없는 배려와 연민, 미숙하고 여린 존재들을 끝없이 돌보는 그녀들의 성정이 좀 더 심리적, 경제적으로 지원을 받았더라면, 그녀들이 꿈꾸던 그녀들의 자리에 좀 더 빨리 가 닿지 않았을까.
잠자리에 누워 이런저런 얘기를 도란거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들 까무룩 잠이 들었던가 보다. 다음날이 일요일인데도 친구들의 핸드폰 알람은 새벽 4시부터 울리기 시작했다. 한 친구의 4시 알람을 끄고 다시 눈을 붙이니 다음 친구의 5시 알람이 울렸다. 휴일에도 습관처럼 이른 알람을 맞춰놓는 그녀들의 일상을 그려본다. 일찍 일어나 독서나 운동 등 자기 계발을 한 후, 식구들의 아침을 준비하고 출근 준비로 바빴을 그녀들의 치열했던 20년(대부분 20년이 훌쩍 넘었다). 자신보다 타인을 돌보느라 몸에 먼저 적신호가 오기 시작한 그녀들이 마음만은 청신호를 유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5시 알람에 먼저 일어난 친구가 홀로 조용히 캠핑장 부근 산책로로 산책을 다녀오며 찍은 사진을 단톡방에 보내왔다. 사진을 보고 다른 친구 옆구리를 찔러 함께 산책에 나섰다. 평소 운동이 부족했던 친구는 약간의 오르막길도 숨차했고 비 오듯 땀을 흘렸다. 먼저 다녀온 친구가 보내준 사진의 풍경을 따라 15분 정도 오르니 멋지게 꾸며진 데크가 나왔다.
친구야, 네 넉넉한 미소를 쭈욱 보고싶다. by 그루잠
멀리 내려다보이는 정경을 말없이 바라보는 친구의 뒷모습을 핸드폰으로 몇 장 찍었다. 남자들도 가기 힘든 여정을 그리 오랜 기간 뚜벅뚜벅 걸어온 그녀가 이 15분 정도의 오르막길을 이렇게 힘겨워할 정도로 건강 상태가 좋지 않은가, 싶어 걱정이다.
내려오는 길에 맞은편에서 올라오는 남녀 한 쌍이 아카시아 잎을 떼며 즐겁게 올라오고 있었다. 언제 적 놀이냐며 너털웃음을 짓는 그녀에게 "우리도 할까?" 했더니 살짝 저어하는 눈빛이었다. 아카시아 잎이 달린 줄기 두 개를 떼어내 친구에게 내밀며 말했다. "우리 하고 싶은 건 이제 눈치 보지 말고 그냥 하며 살자."
내가 한 번 이기면 다음은 친구가 이기고, 서너 번 내가 이겨 이제 마지막 이파리의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듯하면 다음은 친구가 여지없이 비슷한 횟수로 이겨 잎을 연속으로 떼어냈다. 가위바위보를 이기는 사람이 아카시아 꽃잎 한 장씩 떼어내는 추억의 놀이가 이렇게 팽팽한 긴장감을 줄 줄이야. 내 이파리 한 장을 남겨두고 친구가 계속해서 잎을 떼어내는 장면에 마음 졸이다 한 판을 이겨 마지막 잎을 떼어내는 순간, "오예~!"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리며 환호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내려오는 15분 동안 친구와 얼마나 깔깔 웃었는지 모른다.
"친구야, 너 다른 사람 돌보느라 참 많이 애썼어. 이제 너 하고 싶은 거 하면서 네 몸 돌보고 살아. 네 건강 먼저 챙기고."
내 말에 친구가 또 넉넉히 미소 짓는다. 그녀의 푸근한 미소를 난 오래 지켜보고 싶다.
꿋꿋이 자리를 지키며 열심히 살아가다 50을 맞이한 내 친구들이 여태 다른 이들에게 그러했듯, 이제 자신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엄마가, 아내가 건강하게 있어 주는 곳이 가정이란 사실, 항상 잊지 말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