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의 메시지는 일상의 비문과 사적인 은어들이 난무하는 카톡 메시지창에서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처음 대하는 상대라 더 깍듯함이 도드라졌겠지만 첫 만남 이전의 짧은 대화에도 상대의 이미지가 그려진다. 그녀의 예의 바르고 반듯한 톡 메시지를 보며 상상해 보았다. 그녀는 20대일까, 30대일까? 혹시 예상을 깨고 40대라면? 공손한 어투 곳곳에 능수능란함이 숨기지 못하고 뿜어져 나왔더라면 나도 조금은 더 사무적으로 대했을지 모르겠다.
언젠가 친구에게 보내는 내 카톡 메시지를 고등학생인 내 딸이 흘낏 보더니,
"메시지만 딱 봐도 보내는 사람 연령대를 알겠네."
하는 거였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더니,
"일단 한 문장이 너무 길어. 그리고 눈웃음 표시!"
딸이 말한 '눈웃음 표시'란 특수 문자인 '^^'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이게 왜? 했더니 학생들은 절대 그렇게 웃음 표시를 안 한다고 했다. 'ㅋㅋㅋ'를 무한대로 남발하거나 각종 웃음 이모티콘을 보낸다나.
톡 메시지 상에서 10대의 웃음 표시가 그렇다면 20대의 웃음 표시는 ':)'인 경우가 많다. 글로벌한 세대답게 세계인에게 통하는 표현을 택한 걸까? 그녀의 톡 메시지엔 ':)'가 주류였으나 '^^' 표시도 여럿 눈에 띄었다. 무조건 '^^'로만 웃음 표현을 하는 나이 든 상대방을 배려하는 성정의 소유자일 거라고, 혼자 소설을 썼다. 웃을 때 눈 모양을 중시하는 동양적 정서와 입 모양을 중시하는 서양적 정서 사이에서 태생이 오리엔탈인 난 눈이 웃지 않는 웃는 얼굴은 상상이 잘 안 된다. 가장 즐거울 때 난 당연히 입보다 눈이 먼저 웃는다.
'그녀'는 내 파트너 출판사의 마케터다. 그녀가 브런치 출판 프로젝트 10인의 작가전을 위한 프로필 사진 촬영에 동행하겠다는 메일을 보내왔을 때, 난 모든 출판사가 그렇게 하는 줄로만 알았다. 촬영장에 도착하고 나서야 10인의 작가 프로필 촬영에 지원군을 보내 준 출판사는 이곳뿐임을 알고 얼마나 감동했던지. 그리고 그녀의 맑고 반듯한 카톡 메시지에서 풍겨지던 이미지대로 그녀가 20대라는 것과 출판사 업무를 애정으로 배워가고 있는 열정 가득한 막내 직원이라는 것도 알았다.
그녀가 촬영에 동행한다는 메일에 감사하며 "촌사람이 서울 가서 두리번거리지 않아도 되겠다. 든든하다."라고 답 메일을 보냈을 때 괜한 부담을 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나중에 들었다. 처음 가는 길은 20 대건, 50대건 똑같이 낯설 텐데. 모르는 길을 헤매는 데 나이가 뭔 상관이라고. 헤매다 먼저 도착한 내 뒤로 맑은 얼굴로 나타나 겸연쩍어하는 그녀를 보니 미소가 절로 나왔다. 많이 비껴가지 않은 내 상상력에 내 눈이 먼저 지었을 미소를 그녀는 꿈에도 모르리.
이제 얼굴 근접 사진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중년에겐 정색하고 들이대는 카메라 앞이 낯설고 어색하다. 표정을 크게 지을수록 온 주름이 먼저 마중 나오는 느낌이었다. 활짝 웃으라는 뜻으로 하신 사진작가님의 "활짝~!"라는 말이 왜 자꾸 주름을 활짝 펴라는 말로 들리던지... 이 지경이었으니 과거 카메라 앞에만 서면 절로 지어지던 '백만 불짜리 미소'는어디 가고 엉성하고 애매한 표정만 짓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 웃는 표정을 짓고 있노라니입꼬리 근육이 부들부들 제 맘대로 떨렸다.그래도 온화한 표정의 마케터님이 함께 해 주시니 마치 가족과 함께 온 듯 든든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 표정이 조금은 자연스러워졌다면 촬영 내내 미소와 끄덕임으로 함께 해 준 그녀 덕분이리라.
촬영 후, 그녀와 둘이 근처 쾌적한 카페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눴다. 스튜디오 주변 괜찮은 카페를 미리 찾아 두었다는 그녀의 mbti 마지막 자리는 'J'임이 틀림없었다. 마지막 자리가 'P'인 나는 비도 오는데 근처 가까운 아무 데나 가자는 막가파.
내 브런치북을 처음 봤을 때 울고, 초고 완성본을 읽고 또 울었다는 그녀. 이 시간을 저자와의 팬심 가득한 만남으로 기대했겠지만, 실상은 출판사 마케터라는 직업이 너무 궁금한 호기심 많은 중년의 질문을 상대하느라 조금 당황스러운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평소엔 나이 든 이의 호기심이 젊은이의 사적인 영역을 침범하지 않도록 나름 노력하지만 무엇이건 받아주겠다는 다정한 눈빛 앞에서 자제력의 나사가풀려버렸다. 부디 내 태도와 질문이 선을 넘지 않았기를 바랄 뿐이다.
자신의 일과 관계에 진심인 그녀를 보니 그녀의 나이었을 때의 내가 떠올랐다. 나고 자란 곳, 익숙한 혈육과 관계를 떠나 오롯이 나 홀로 세상과 맞닥뜨려야 한다는 생각에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던 때. 내 약점을 들킬세라 온몸을 곧추세우고 세상을 씹어먹진 못하더라도 밀알의 선봉은 되어보고자 애쓰던 그때가 말이다.
그녀와 당시 내 20대의 차이가 있다면, 나의 20대 후반은 눈에 띄는 젊은이가 많지 않은,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인구가 적은 촌에서-상대적으로 노령 인구 비율은 높은- 보냈으나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구수가 많은 거대한 군중 속에서 그림자 같은 1인분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평온하나 일거수일투족이 눈에 띄어불편했던 나의 20대 후반의 시골 라이프와 북적이나 익명성이 보장되는그녀의20대 대도시 라이프. 인간의 삶에 환경이 미치는 영향이 적지 않을 텐데, 그녀의 20년 후는 지금의 나와 어떤 다른 모습일까.
촬영 마지막에 그녀가 저자 싸인을 부탁하며 내 책을 2권 내밀었다. 다른 이들에게도 써 주는 똑같은 문구 아래 이 문장을 추가했다.
'밥 꼭 챙겨 먹어요.'
내게 익숙한 것들을 떠나 낯선 곳에서 자신의 삶을 일구는 젊은이들, 특히 20대 여성들을 만나면 언제나 가슴이 뭉클해진다. 20여 년 전, 고군분투하던 내 모습 같기도 하고 10년 후 내 딸의 만만치 않을 미래를 미리 만난 것 같기도 하고... 이래저래 마음의 온도가 오른다. 그녀들이 세끼 밥 잘 챙겨 먹으며 자신의몸과 마음을 잘 돌보기를 바란다. 우리 세대가 미처 다 일궈놓지 못해 여전히 울퉁불퉁한 그녀들 앞에 놓인 자갈길을 든든해진 몸과 마음으로 잘 건너주길 바라는 마음에서다.
꽃길을 못 걸어본 세대라 어떻게 걸어야 꽃길이 생기는지 잘 모른다. 그래도 낯선 길도 멈추지 않고 계속 걸어가는사람들이 있다면 뒷사람도 무난히 따라갈 수 있는 작은 오솔길 하나가 생길 테지. 꽃길로 이어질 그녀의 자갈길에 마음 담아다음과 같은 응원의 표지판 하나 꼽아주고 싶다.
멈추지만 않는다면 꽃길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파이팅!
그녀가 찍어 준 내 흔적. 그녀는 이것을 '다정함'이라 이름 붙였다. 다정한 이들은 세상사를 다정함의 렌즈로 본다. by 그루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