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 누적된 피곤이 하루 앞둔 주말권 앞에서 근근이 버티는 목요일 오후 4시 30분. 친정 엄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큰딸의 책 한 권 빠짐없이 읽었다.
친정 엄마께서 서점에 책을 부러 사러 가신다고 했을 때, 보내드리겠다고 말렸었다. 저자용 책이 아직 몇 권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는 직접 사러 가시겠다고 했다. 괜히 작은 서점에 가셨다가 내 책이 입고 안 됐으면 어쩌나... 걱정이 되었다. 엄마는 가시려는 서점이 고속버스 터미널 부근에 있어서 꽤 크니 걱정 말라하셨다. 그래도 출발 전에 전화로 입고 여부를 확인하고 가시라고 당부드렸다. 그게 두어 달 전이었나.
<어린이의 문장>은 젊은 세대 메인 타깃이라 판형, 글자 폰트 크기, 책 표지 및 내지 디자인 모두 젊은 감성의 책이다. 처음 책을 받아보았을 때, 작은 본문 글자 크기에서 느낀 당황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나도 글자가 작아 읽을 때 안경을 벗어야(노안ㅠㅠ) 겨우 읽을 수 있는데 70대 중반인 친정 엄마가 어찌 읽으시려나.
딸이 책을 냈다니 딸을 위해 한 권이라도 팔아주고 싶은 엄마 마음이려니, 생각했는데... 두 달 동안 야금야금 읽어내신 모양이었다. 그 작은 글자들을 어찌 다 읽으셨냐고 여쭸더니, "돋보기 써가며 조금씩 읽었"다고 하셨다. 엄마는 그렇게 고생하셔서 겨우 읽어내시고는 "좋더라"란 말 대신,
이 책 만들면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하셨다. "다시 생각해 보니 짠한 마음과 대견한 마음이 교차한다"고도 남기셨다. 퇴근 후 글을 쓰던 나를 건강을 해친다며 자주 말리시던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내 책을 사서 돋보기를 써가며 한 장, 한 장, 끝까지 읽으셨다니 뭉클했다. 다른 이의 책이었다면 그렇게 힘들게 읽으셨을 리가 없었다. 엄마는 성경책 필사 외에 책을 읽기 힘들어하신다.
그런 엄마가 어떻게든 읽어내기 위해 돋보기까지 써 가며 끝까지 읽어낸 힘은 어떤 것일까. 가족들 중 내 책 읽은 이 하나 없다고 샐쭉했었는데 이제 그럴 일 없게 됐다. 직계 가족 중 첫 완독자가 생겼으니 말이다.
언젠가 2학년 한 아이가 개발새발 쓴 글의 내용이 너무나 궁금해서 암호를 해독하듯 따져 내용을 살폈던 적이 있었다. 그 글의 맥락이 완전히 이해됐을 때 어찌나 기쁘던지. 그때 느꼈던 희열이 엄마가 내 책의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와 비슷했을까.
작은 글씨체를 돋보기를 써 읽어내는 마음. 알아보기 힘들 정도의 난필로 써진 글의 맥락을 기어이 파악하고자 하는 마음. 이것은 상대방에 대한 관심과 사랑 없이는 생기지 않는 마음들이다. 우린 각박한 세상에서도 그런 마음을 한 줄기 빛 삼아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며칠 전, 교실 전화가 울려 받아보니 후배교사 P였다. "교실에 계신다면 잠시 찾아뵙고 싶다"고 했다. P는 작년에 동학년을 함께 하며 친분을 쌓았으나 올해는 다른 학년 담임을 맡게 되어 다른 층에 위치하니 거의 얼굴 볼 일이 없었다.
무슨 일일까, 궁금했는데 교실 뒷문을 조심스레 밀며 들어서는 그녀의 손에 내 책, <어린이의 문장>이 들려 있었다. 그것도 3권씩이나. 후배 교사 손에 들린 내 책이 왠지 민망하여 난 얼굴이 조금 상기됐을 것이다.
"아니, 우리와 함께 지내면서 어떻게 글을 다 쓰셨어요. 선생님의 시간은 저와 다르게 흘러가나요?"
평소 조곤조곤한 후배 교사의 귀여운 너스레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찌 알았냐는 내 질문에 관심이 있으면 다 안다는 말에 한 번 더 웃었다.
선물할 책이라며 그녀는 저자 싸인을 요청했다. 선물할 상대 이름을 물으니 한 명은 친구, 다른 한 명은 남편이라고 했다. 본인 책을 이미 한 권 샀으면서 남편에게 똑같은 책을 선물하는 마음 또한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랴.
사랑을 가득 담아 건네질 <어린이의 문장>의 노란 표지가 유난히 사랑스러웠다. 젊은 초등 교사인 P의 친구와 남편이 가뜩이나 힘들고 우울한 시기를 보내고 있을 요즘, 책에 쓴 내 문장이 작은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를 돌보는 모든 마음들 덕분에 부족하고 불완전한 나도 새날을 맞이하고 온전히 살아낸다. 혼자라고 느껴질 때, 도저히 혼자 힘으로 어찌할 수 없을 때, 내 주위에서 도울 거리가 없나, 하고 떠도는 흑기사의 다정한 손을 잡아보자. 그 덕에 좀 더 나아진 내가 언젠가는 누군가의 흑기사가 될 수 있도록.
<어린이의 문장>, p.31
미지의 독자들에게도 사랑을 가득 담아 <어린이의 문장>을 보내본다.
<어린이의 문장>은 아래 사이트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물은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겨도 담긴 그릇의 모양대로 채워집니다. 사랑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사랑의 모습은 달라질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