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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Sep 23. 2023

'메추리알 장조림'에 담긴 사랑은 어떤 모양일까요?


그녀가 내 손에 쥐어준 것은 뜻밖에도 '메추리알 장조림'이 담긴 유리병이었다.

그녀가 건넨 유리병엔 메추리알과 고기, 꽈리고추가 알맞은 비율로 섞여 있었다. 물과 끓여낸 간장 액을 적절하게 머금어 짙어진 빛깔이 고왔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유리병 속을 어찌 그리 실하게 채웠는지. 투명한 유리병에 정직하게 드러난 내용물이 무척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메추리알이 그렇게 예쁠 일인가. 탱글탱글한 메추리알과 딱 먹기 좋게 숨이 죽은 꽈리고추가 어찌 한 솥에서 뭉그러지지 않고 이리 곱게 익었을까.


실물은 사진도 못 찍고 먹어치워서 가장 비슷한 사진으로 빌려 왔어요. by 소확행으로 채우는 하루님 블로그


"이게 뭐냐?"며 눈이 휘둥그레진 내게 그녀는 "언제가 한 번은 그대의 우렁 각시가 되어 주리라 마음 먹었었"다고 했다. 우렁 각시? 이게 무슨 소리지? 하다 퍼뜩 한 장의 사진이 떠올랐다. 이글거리던 지난 여름날, 나무 그늘 아래 펼친 캠핑 의자에 앉아 내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노라며 그녀가 보내온 사진 한 장.


'오늘 저녁은 뭘 먹지?' 매일 퇴근길이면 하는 똑같은 질문이지만 매번 답을 쉬 찾지 못한다. 질문은 같은데 매일 다른 답을 내놓아야 하니 이렇게 난이도 높은 문항이 있을까. 이런 날 우렁 각시, 아니 우렁 신랑이 있어 "오늘 저녁 요리는 닭볶음탕에 된장국. 조속 귀환 바람." 이런 메시지를 보내준다면 그날은 재벌 2세도 부럽지 않으련만. 현실은 우렁 신랑은 고사하고 퇴근길 장보기까지 일이 하나 더 는다. 냉장고에 무슨 식재료가 남아 있더라? 손으로는 핸들을 붙들고 마음은 냉장고 속을 헤집는다.

- 정혜영, <어린이의 문장>, p 149~150


그녀가 하루, 내 우렁 각시가 되어주겠다고 마음먹은 건 이 대목에서였을 테다. 누군가의 삶의 기록을 허투루 보지 않고 한 번 더 마음 쓰는 정성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녀 같은 사람을 나는 '다정한 존재'라 부른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세상은 반짝이는 존재들 덕분에 큰 변화를 맞지만 다정한 존재들 덕분에 고르게 나아간다. 그녀의 정성 가득한 든든한 메인 반찬 덕에 난 오랜만에 저녁 식탁 앞에서 당당했다. 연습을 위해 매주 월요일, 주 1회 만나는 한국식 오카리나 교원 앙상블 멤버인 그녀가 멀리 시흥에서부터 일산까지 먼 길 품고 온 따뜻함이 그날 밤에 그치지 않고 내내 내 속을 훈훈히 데운다.  



사랑은 어떤 모양일까?

영화 <세이프 어브 워터: 사랑의 모양>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물과 사랑의 유사성을 이렇게 언급한다. 물이 어떤 모양의 그릇에 담겨도 담긴 그릇의 모양대로 채워지는 것처럼 사랑 역시 사랑에 빠진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 사랑의 모습은 달라질 수 있다고 말이다.

영화를 볼 때는 고개를 주억거렸었는데 지금의 나는 사랑의 모양이 둥근 형태에 가깝다, 여긴다. 배 아플 때 살살 돌려주시던 엄마의 약손, 아이들과 매일 부는 소프라노 오카리나 악기인 독도리나, 마늘 한 망을 다 까시느라 웅숭그린 시어머니의 늙고 작은 몸, 외롭게 버티다  영혼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주말마다 모이는 몇 만에서 몇십만의 검은 점들... 상대에게 기울이는 마음의 모양은 모두 그렇게 원형을 닮았다.


매년 깊어가는 가을, 드러난 살이 찬 바람에 소름을 돋우기 시작할 즈음, 지인은 친정 부모가 일군 고구마를 판매하기 시작한다. 강화의 황토에서 자라난 강화 고구마인데 익히면 속이 노랗다고 하여 '강화 속노랑 고구마'라 불린다.


지인이 구워 온 고구마가 너무 달아 그해 냉큼 주문해서 집에서 바로 구워 먹었는데 도통 그 맛이 아니었다. 지인에게 맛이 덜하냐고 묻지는 못하고 그저 그 댁 에어프라이어 성능이 더 좋은가 보다, 고만 다. 눈치 빠른 지인은 내 말 뜻을 곧 알아채고는 땅에서 막 캔 고구마는 어느 정도 습기를 말려주어야 당도가 올라간다는 귀한 정보를 알려주었다. 신문지를 널찍이 깔고 2주쯤 베란다에 잘 널어 말린 후 다시 구운 고구마는 처음 맛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당도가 쭉 올라가 있었다. 에어프라이기 내의 열기를 못 견디고 삐죽 터져 나온 고구마 속살은 곧 달고나였다.


얼마 안 가 지인이 고구마 판매를 시작할 것이다. 고구마를 주문하다 보면 친정 엄마, 동생들이 줄줄이 고구마 줄기처럼 생각나는 이유 역시 둥글넓적한 고구마가 사랑의 모양을 닮았기 때문일 게다. 고명재 시인은 '땅 속에서 나는 것들은 대체로 달다' 말했었지. 시인도 알았을까. 땅 속에서 난 것들은 어느 정도 숙성의 기간을 거쳐야 더 달아진다는 것을. 사랑이란 그렇게 시간과 정성을 들여야 더 깊어진다는 것을.


올해는 강화 고구마를 한 상자 더 주문해 부쳐야겠다. 흰 것들은 허물어지기 쉬워서 마음을 써서 다루어야 한다는 시인의 말처럼, 희고 여린 메추리알을 마음을 써서 다루었을 그녀에게.

2주간 숙성해야 더 달콤해진다는 말을 잊지 말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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