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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Nov 18. 2020

관계와 균형에 관한 이야기,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귀한 내 시간 허비하는 게 너무 싫어서 스토리도 시사하는 바도 애매한 영화를 보게 되면 부아가 치밀곤 한다. 그런데 책은 아니다 싶으면 바로 덮을 수 있어서 좋다. 좀만 더 봐보면 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두 번 이상 들면 의심해봐야 한다. 책이건, 영화건, 사람이건, 덮을 타이밍인가, 하고.


그런 점에서 이 책,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는 가벼운 중량감, 발랄한 문체라 일단 지루하지 않다.

제목처럼 애쓰지 않아도 편안하게 읽을 수 있다. 그래도 한 챕터, 한 챕터에 담고 있는 이야기는 인간 심리를 다룬 책 몇 권을 동시에 담아낸 듯 깊이가 있다. 걸친 옷의 무게가 가볍다고 입고 있는 사람마저 가벼운 사람 취급하면 안 되는 것이다.


너무 오래된 책이나 나이 지긋하신 작가들의 책을 읽다 보니 요즘 젊은 세대들의 용어나 사고방식이 궁금해져서 들여다본 책이었다. 역시 젊은 생각은 생기가 넘쳐서 좋다.

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사람인지, 나이 듦에 따라 생긴 습관인지, 똑같은 말도 꼬아서, 돌려서 하고 쓸데없이 말이나 문장의 길이만 길어진다. 그러다 보니 듣는 이, 읽는 이들의 피로도만 높이는 것 같은 말투와 문체를 좀 손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차다. 짧은 한 마디로 화자가 의도하는 바를 깔끔하게 전달하기. 작가는 나에게는 어려운 이 일을 참 쉽게 해낸다.


이 책이 '관계와 균형'에 대한  책이라고 소개한 작가 인터뷰 글을 본 적이 있다. '나는 타인의 마음을 알 수 없다'는 명제가 고민의 시작이자 책의 발단이라고. 그래서 작가는 인간관계 속에서 휘둘리지 않으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을 지켜나가기 위해 마음에 새겨야 할 것들에 대해 쓴다고.


다음과 같은 간결하고 깔끔한 문장들이 내 마음에 와 닿았다.

남한테 장단 맞추지 말어.
북 치고 장구치고 니 하고 싶은 대로 치다 보면 그 장단에 맞추고 싶은 사람들이 와서 춤추는 거여. (p.25)


유튜브 화제 인물이었던 박막례 할머니의 말씀을 할머니의 일러스트와 함께 실은 페이지에서 생각이 오래 머물렀다. 남한테 장단 맞추지 말라는 말이 마음에 깊이 들어왔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제 남 눈치 볼 것 뭐 있나, 싶으면서도 괜히 아랫사람들에게 체신머리 없어 보일까 봐 말과 행동이 더 조심스러워진다.

 



지난여름, 오랜만에 중학교 동창이자 절친이었던 친구를 만났다.

친구는 몇 년에 걸쳐 부동산을 사고팔며 나름 짭짤한(?) 맛을 보았던 모양이다. 아끼는 친구인 나에게 그 맛을 나눠주고 싶다는 친구의 오랜 설명을 듣고 살짝 동했다.

집에 돌아와 한동안 네*버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며 관심도 없던 지역까지 장시간 쭉 훑어보다가 정신이 들었다. 나 뭐 하고 있는 거지? 알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관심도 크게 없으며, 재능은 더 없는 '부동산으로 돈 굴리기'를 꿈꾸다니, 헛웃음이 나왔다.


친구는 정말 선의에서 내게 좋은 것을 함께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그 분야에 관심도 많고 재능도 있어서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실력도 늘어갔을 거다. 그러나 나란 사람은 부동산 앱 지도를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금세 피로가 쌓이는 족속이다. 친구에게 좋다고 내게도 마냥 좋기만 할 리가 없다.


친구의 말에 솔깃해서 부동산 앱을 들여다보며 지낸 일주일 동안, 나는 내가 좋아 매일 해오던 오랜 습관들(오카리나를 연습하고 책을 읽는)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내 시간이 소중해서 1시간 30분짜리 영화에도 기대치와 다르면 분노하던 내가 일주일을 그렇게 허비하다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서 다시 마음을 고쳐 먹는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자, 그러다 보면 박막례 할머니 말씀처럼 내 장단에 맞추고 싶은 이들이 와서 춤춰줄 때도 있겠지.





나약해서가 아니라 더 단단해지기 위하여, 우리에겐 도움받을 용기가 필요하다. (p.49)


지금 생각해 보면 어린 시절엔 참 쓸데없는 자존심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나의 치부를 들키고 싶지 않았고, 혼자 감당하려다 버거워하던 때가 많았던 것 같다. 개인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점점 더 크고 넓어지는 세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모난 곳이 깎여간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것도 배운다. 그러다가 나도 도움받은 이들에게 무엇인가 나눠줄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난 너 마음에 안 들어.

어머, 나도. (p.32)


실제로 이런 대화가 일어날 일은 거의 없을 것이다.

면전에서 저런 얘기를 할 정도의 관계라면 마주 보고 대화할 만남은 피하게 될 테니까. 하지만 상상만 해도 통쾌하다. 나의 말과 행동의 한 면 만을 보고 함부로 판단한 사람에게 "나도 너 싫거든~" 할 수만 있다면, 우린 말 못 하고 돌아서서 억울해하고 속상해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오늘부터 저 짧은 응답을 마음속에 품고 다니려고 한다. 나의 인내를 시험대에 올리는 사람들은 저 말을 듣게 되는 첫 실험 대상이 될 터.


균형이란 더 할 수 있어도 더 하지 않는 것. (p.69)


더 오래, 더 멀리 갈 수 있도록 돌아올 힘을 남겨두는 지혜를 새겨두어야겠다.

톨스토이 단편선에서 읽은 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한 남자가 해가 지기 전까지만 돌아온다면 출발점에서 도착점까지 이르는 땅을 모두 주겠다는 말을 들었다. 더 많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욕심을 부리던 그는 무리해서 너무 멀리까지 가버렸다. 뒤늦게 늦어버린 시간을 깨닫고 서둘러 돌아오지만, 한계에 달한 체력으로 죽음에 이르고 만다. 결국 차지하게 된 땅이, 자기 죽은 몸이 묻힐만한 딱 그만큼의 땅이더라는 이야기.

매사 과유불급하지 않는 적정선을 찾아야 할 터다.


이론이 아니라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의 힘은 세다.

항상 아이들에게 하는 말, '나를 사랑하고 타인을 배려'한다면 세상은 더 살만한 곳이 될 것이다.

지금 내 옆에 있는 이에게 무심코 건네는, 진심에서 우러나온 존중의 말 한마디 건네보자. 애쓰지 않고 편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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