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Mar 02. 2024

'다정한' 학교가 오래 살아남는다


"엄마, 우리...바..엉엉..  남자..엉엉 애 둘이 으헝엉... 계속 따라오면서 나한테 바어엉..버 , 멍청이.. 흐엉헝... 놀려 으엉엉..."

딸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어느 날,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핸드폰이 연결되자마자 딸의 숨 넘어가는 흐느낌에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눈물, 콧물 어하는 말이라 처음엔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도 힘들었다. 겨우 맥락을 연결해 보니, 딸과 같은 반 남학생 두 명이 하굣길에 계속 따라오면서 '바보', '멍청이'라고 놀린다는 것이었다. 딸이 전화했을 때는 이미 그 남자아이들은 가버린 뒤였다.


내 생각의 뇌가 잠시 갈피를 잃은 건 아마도 딸의 급박하고 서럽던 울음에서 위급함을 감지했기 때문이리라.

딸에게 "혹시 그 애들에게 너도 뭔가 안 좋은 말을 한 건 아니냐?"라고 다그쳤더니 딸은 억울해 죽겠다는 듯 더 게 울면서 자기는 그 애들한테 아무것도 안 했다는 것이었다. (그 애들의 거슬리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라고 했느냐고 물었더니 당연히 했는데도 계속 그랬다는 것이다. 전에도 그런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더니, 종종 그런 적이 있었다고 했다. 딸이 말을 연결하면 '이상의 아이들'이 '지속적으로' 딸을 '괴롭혀' 왔다는 아닌가!   

"아니, 그런데 왜 한 번도 말을 안 했어!"

지속적인 놀림을 당하고 있었으면서도 그렇게 울고만 있는 딸의 상황이 너무 답답해서 괜히 안 그래도 속상할 딸아이를 질책하고 있었다.


유치원 때부터 내 근무지를 따라다니느라 딸은 초등학교 3학년이 되도록 동네 친구를 사귀지 못했다. 학교에 가야만 친구가 있었기 때문에 딸은 항상 동네 친구가 있는 학교 친구들을 부러워했었다. 늦기 전에 집 가까운 곳으로 옮겨주자, 마음먹고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마칠 무렵 집 근처 학교로 전학을 시켰는데, 딸은 생각보다 새 학교와 새 친구들에게 적응이 더뎠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 나아지겠지... 해 줄 수 있는 게 적어 안타까운 마음만 가득했던 직장맘의 마음에 불이 일었다. 적응도 잘 못하는 아이가 친구들에게 놀림까지 받고 있었던 건가, 싶으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딸아이가 학교에서 계속 놀림을 받아 왔다는 걸 담임 선생님은 알고나 계신 걸까? 딸의 새 학교 적응을 걱정하면서도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따로 연락이 오지 않는 것을 무소식이 희소식이려니... 여겼던 내가 너무 한심해서 화가 났다. 연락 한 번 없으셨던 딸의 선생님에게 속상한 마음이 앞섰다.


시끄러운 속을 달래며 딸의 담임 선생님께 연락을 드렸다.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으려면 선생님께서 알고 계신지 확인해야 했고 모르셨다면 알려드려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선생님께 딸에게 있었던 일에 대해 자초지종을 말씀드렸다. 침착하고자 노력했지만 흔들렸을 내 목소리와 달리 선생님께서는 차분하게 응대해 주셨다.


딸의 담임 선생님과 통화를 마친 후, 두 가지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첫 번째는, 딸을 지속적으로 놀려왔다고 지레짐작했던 두 남자아이는 평소 내 딸과 허물없이 장난을 주고받는 사이로, 평소 행동거지가 그리 나쁜 아이들은 아니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남자아이들이 짓궂은 장난을 칠 때, 딸이 단호하게 싫은 내색을 안 비치고 주로 어정쩡한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었다. 딸은 5학년이 되면서 서서히 사춘기가 오기 시작했고, 이성 친구에 대해 관심과 무시 사이를 오가며 애매한 감정을 갖기 시작한 시기였다.


다음 날 선생님께서는 딸과 남자아이를 따로 불러 이야기를 나누어 주셨고, 두 남자아이는 그 자리에서 딸에게 사과하고 앞으로 말과 행동에 주의하기로 했음을 내게도 연락하셔서 친절히 알려 주셨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딸이 엉엉 울면서 전화했던 당일, 그 남자아이들은 딸과 평소처럼 장난을 치다가 딸이 울기 시작하자 놀라서 이미 사과를 했다는 것이었다. 딸에게 왜 그때 그런 얘기를 다 하지 않았냐고, 다음엔 꼭 있는 대로 이야기해 줄 것을 신신당부했다.


만일 그때 딸의 말만 듣고 이성을 잃어 그 남자아이들을 함부로 비난했다면, 선생님의 무심함에 속상한 나머지 선생님과의 전화 통화에서 그런 뉘앙스를 한껏 풍겼다면 어쨌을까... 힘들게 여겨졌던 일부 학부모의 언행과 똑같았을 내 모습을 떠올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쓸데없이 걱정을 키우지 않도록 친절하고 다정하게 문제를 해결해 주신 아이 담임 선생님께 감사했다.


있는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고 딸을 나무라기는 했지만, 생각해 보면 울고 화내고 소리치는 이 어린 배우들을 어찌 나무랄 수만 있겠는가. 자신의 부당한 상황을 어떻게 하면 보다 효과적으로 부모에게 어필할 수 있을지 고심하는 아이들의 궁여지책을 뭐라 꼬집겠는가 말이다. 평소 일과 가사, 육아를 병행하는 엄마가 딸의 눈에도 여유롭게 보이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엄마의 관심을 온전히 받고 싶어 했을 아이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주지 못해 미안했다.

아이의 감정이 북받쳐 있을 때는 먼저 부모의 감정을 다스려야 할 때이다. 부모가 함께 흥분하면 아이에게 일어난 사실을 객관적으로 살펴보기 어렵다.   


이런 경험을 떠올리며 매년 새 학기 첫날, 우리 반 학부모들께 보내는 담임 인사장에 '학부모님께 드리는 부탁' 사항을 덧붙여 보낸다.

- 제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문제가 생겼을 때는 섣불리 판단하시지 마시고 저에게 문자나 전화로 먼저 연락해 주세요.

- 교육은 교사-학생-학부모가 삼위일체로 협력할 때에 가장 효과적입니다. 올 한 해, 저와 학부모님의 관계 속에서 우리 아이들이 한층 더 성장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우리는 내가 속한 집단의 구성원들에게 얼마나 다정한 사람들인가. 또 서로 다른 곳에 속한 이들에겐 또 얼마나 매몰찬가. 책,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브라이언 헤어 & 바네사 우즈)에 소개된 '사람 가축화 가설'에 따르면, 인간은 자신과 같은 집단 구성원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친화력을 느끼는 반면, 그 범위 밖의 외부인에 대해서는 비인간화하는 능력을 보인다고 한다. 그래서 한없이 다정한 우리 비인간화한 외부 집단에 대해서는 잔혹한 행동까지 서슴지 않고 저지를 수 있다는 것이.


작년 내내 모든 교사들의 마음에 씻을 수 없는 미안함으로 남은 서이초 사건(다행히, 2월 27일 인사혁신처는 서이초 교사에 대한 순직을 인정하고 유족에게 이를 통보했다)고군분투하는 선생님들에게 쏟아지는 각종 민원들... 이 모든 불행의 원인은 어쩌면 교사-학부모가 서로를 다른 이질적 집단이라고 여기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게 상대를 비인간화한 채 오해와 불신을 쌓아가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우리 아이들의 더 나은 성장을 기대하며 조력자로서 최선을 다한다는 점에서 교사와 학부모는 이질 집단이 아니다. 모든 아이들의 건강한 교실을 위해 교사와 학부모가 서로 협력하는 한 집단으로 여긴다면, 예민하게 생각했던 일들도 조금은 너그럽게 대할 수 있지 않을까.

내 딸의 경우처럼, 마음이 앞서 오해했던 일도 한숨 참고 들여다보면 사실을 왜곡하지 않고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긴다. 서로가 문제 상황을 함께 협의하고 공동으로 해결해 나가는 집단으로 여길 때, 우리는 상대를 다정하게 대할 있을 것이다. 당연히, 그런 '다정한' 학교가 오래 살아남지 않겠는가.

 

다정한 학교가 오래 살아남습니다 (사진 출처: pixabay)




이전 08화 선생님의 방학, 다음 교실을 생각하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