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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Feb 10. 2024

아이마다 경쟁을 즐기는 정도가 달라요

* 이 연재 글에 쓰인 학생들의 이름은 모두 가명임을 밝혀둡니다.



아이들의 면면을 속속들이 관찰하기에 소집단 활동이나 편을 가른 놀이 활동만 한 게 있을까. 

모둠 수업이나 놀이 활동을 진행하는 동안 아이들은 각자의 모둠 안에서 의견을 나누고 결정을 내리며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 위해 상호 협력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들은 각자가 가진 성격과 개성, 자질, 재능 등을 가감 없이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때로는 공모와 협잡, 배신으로 울고 토라져 파투 나기도 하지만, 대부분 서로 협력하고 배려, 존중하며 상호 간 격려와 칭찬으로 일궈낸 공동의 성과물에 뿌듯해지는 기회를 어찌 놓칠 수 있겠는가.   


해초와 대호는 매우 다른 성향의 아이다.

해초는 형제, 자매가 없는 외동딸이고, 대호는  살 터울 형이 있는 둘째 아들이다.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더 받고자 형제 지간과 겨룰 필요가 없이 자라서인지, 해초는 승패를 겨루는 유형의 활동유난히 싫어했다. 반면에 어릴 적부터 형과 모든 것을 나누거나 심지어 뺏겨야 했던 대호는 그런 유형의 활동에 눈이 반짝였다.


해초는 경쟁에서  때 겪게 되는 익숙하지 않은 불쾌한 감정을 미리 피하고 싶어 했다. 놀이 활동에 대해 안내를 하면 "이거 이기고 지는 놀이인가요?"를 먼저 묻곤 했다. 그런 활동일 경우, 배가 아프다거나 발이 불편하다는 핑계를 대며 활동에서 빠지려고 했다.


대호는 경쟁이 익숙한 아이다. 형은 서열 관계에서 어쩔 수 없이 뛰어넘을 수 없는 존재여서 답답했는데 또래 친구들과 겨룬다니, 모처럼 눈치 안 보고 이겨볼 수 있는 기회다. 지는 감정은 불쾌하지만, 매일 지는 것 같기만 한 일상을 뒤엎을 절호의 찬스를 놓칠 수 없다. 그러니 신이 날 수밖에. 지루하기만 한 선생님의 설명은 됐고, 어서 빨리 놀이를 시작하기만을 바라며 몸이 비틀린다.


그러다 모둠별 역할놀이를 할 때면 상황이 달라진다.

엄마, 아빠가 모두 연극배우로, 어릴 때부터 종종 부모님의 연극을 보고 자라온 해초는 등장인물의 특징을 살려 연기하는 활동에 익숙하다. 모둠 친구들과 등장인물 배역을 나누고 연습하며 해내는 역할극은 승패를 가르는 경기가 아니라는 점이 더 마음에 든다. 평소 좋아하는 활동이기 때문에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친구들과 소통한다. 친구가 잘 안 되는 부분을 돕고 "괜찮아. 잘할 수 있어"라는 독려를 아끼지 않는다. 모둠이 정해진 시간 내에 역할극을 잘 해내려면 충분한 연습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혼자 아무리 잘해도 다른 친구가 제 역할을 다해 주지 못하면 제대로 빛나기 어려운 게 역할 놀이니까.


대호는 역할놀이 때마다 대략 난감하다. 평소 승패가 명확한 놀이를 선호하는 대호는 배역 정하는 시작부터 순탄치 않다. 인물의 특징을 살려 말하고 행동으로 표현하는 일은 너무 어색하기만 하다. 그러니 어떤 역할도 맘에 들 리가.

대호네 모둠은 대호가 끝까지 역할을 정하지 못해서 연습할 시간을 흘려버리고 있었다. 하고 싶은 것을 적극적으로 말하지도 않으면서 친구들이 고르고 남은 배역은 절대로 하기 싫다고 버티는 대호 때문에 진퇴양난이다. 내가 다가가 넌지시 "하고 싶었던 배역이 어떤 거였어?" 물어도 대호는 쉽게 답을 하지 못했다. 


이렇게 한 사람으로 인해 주변인들이 모두 안절부절못하며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건 모두에게 손해다. 마음을 닫고 있는 아이에게 선택을 재촉하는 것보다는 혼자만의 시간을 충분히 주는 게 더 효과가 있는 법.

"대호야. 생각해 보고 네가 하고 싶은 역할이 정해졌을 때 선생님한테 알려줘."

대호의 모둠은 비어있는 역할을 빼고 우선 연습을 시작했다. 5분쯤 지나자, 대호가 쭈볏쭈볏 다가와 "저 00 하고 싶어요." 하며 맡고 싶은 역할을 작은 소리로 얘기했다. 그 역할은 이미 다른 아이가 맡기로 했던 역할이었다. 또다시 난감한 상황이지만 문제를 교사 혼자 해결할 필요가 없다. 아이들을 믿고 가는 수밖에.


대호 모둠 학생들에게 이런 대호의 의사를 전하고 어떻게 하면 좋을지 의견을 물었다. 다행히, 그 역할을 맡기로 했던 아이가 양보의 뜻을 보였다. 그렇다고 우는 아이만 젖을 먹는 결과가 되어선 곤란하다.

"그럼, 대호야. 민재가 고맙게도 양보해 주기로 했으니 이러면 어때? 민재가 연습 중이었으니 먼저 민재가 그 역을 맡고 두 번째 할 땐 대호가 그 역할을 맡는 거지. 서로 번갈아 가면서 그 역할을 해보는 거야. 그러고 나서 더 맞는 역할을 정하는 건 어떠니?"

이것도 저것도 싫다던 대호는 자기의 선택이 수용될 여지가 생기자 고개를 끄덕였다.


결과는 어땠을까? 직접 연습해 보니 대호가 맡고 싶어 했던 역할은 대사가 너무 많았다. 짧은 시간에 혼신을 다해 대사를 외우기엔 역할극에 대한 대호의 열정이 크지 않았다. 나중에 어떻게 하기로 했냐고 물었더니 처음에 남아 있역할, 대호가 절대 안 하고 싶다던 그 역을 맡기로 했단다.

절대 안 할 거라던 대호의 결연함이 떠올라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그렇게 단호했던 표정은 어디 가고 천진해진 대호의 표정을 보니, 뭉쳤던 내 마음 근육도 한 뼘 펴졌다. 스스로의 선택과 친구들의 배려, 직접 해 본 경험 덕분에 대호네 모둠은 무사히 역할극을 마쳤다.


경쟁의 결과가 성공한 자의 기쁨과 실패한 자의 좌절이라는 두 가지 모습만은 아니잖아요 (그림 출처: pixabay)



아이마다 경쟁을 즐기는 정도는 다르다. 아이들은 경쟁을 통해 발전하기도, 하기도 전에 쉽게 좌절하기도 한다. 경쟁을 통해 자신의 성공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아이, 협력을 통해 안전한 성공감을 맛보고 싶은 아이. 교실에는 서로 다른 성향의 아이들이 함께 한다.

그러나 경쟁에서 지는 결과가 싫어 미리 시도조차 꺼리는 아이도, 경쟁에서 이기는 환희를 쫒는 아이도 경쟁의 상황을 오롯이 혼자 치러내는 게 아니다. 나를 돕고 배려하며 격려해 주는 이들과 함께 하니 경쟁을 미리 무서워할 필요도, 우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자라면서 수많은 경쟁 상황에 맞부딪힐 아이들. 경쟁의 결과가 성공한 자의 기쁨과 실패한 자의 좌절이라는 두 가지 모습만은 아니라는 걸, 미리 알려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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