캘리그래피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신세계를 맛보고 있다. 처음 화투를 배우면 어딜 가나 머릿속에 화투짝만 생각난다더니, 내가 딱 그 짝이다. 어디를 가나 간판이나각종 안내 포스터에 쓰인 캘리 글씨체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곳에캘리그래피가 활용되고 있었다니!역시 세상은 아는, 아니 관심 갖는 만큼만 보인다.
캘리그래피는 손 글씨를 이용하여 구현하는 시각 예술이다. 일반 글씨와 달리 상징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글씨의 크기, 모양, 색상, 입체감으로 미적 가치를 높인다.
내 글씨가 미적 가치를 지니게 하려면 어떻게 써야 할까? 그것을 염두에 두고 글을 쓰다 보면 몇 문장 쓰는 것도 쉽지 않다. 연습장 서너 장 쓰는데 한 시간이 후딱 지나간다. 집중해서 쓰다 보면 어느새 콧등과 등에서 땀이 배어 나온다.
글씨쓰는 데에 이렇게 진지할 일이야? 생각하다가도 자꾸 쓰다 보면 좀 더 괜찮아 보이는 게정직하게나오니 나도 모르게 몰입하게 된다. 역시 예술품은 질이 아니라 양이다. 무조건 다작해야 그중 겨우 나은 한, 두 개를 건질 수 있으니까.
처음 캘리를 배울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지금도 어렵지만) 내 본래 글씨체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처음엔 어떻게 써도 기존 내 글씨 스타일이 나와서 일반 글씨와 구분이 잘 안 됐다. 그래도 화실 선생님의 글씨를 무작정 모방하며 연습하다 보니,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선생님 글씨체를 비슷하게 구현해 내고 있나,싶은 날이 있었는데...
언젠가 화실에서 연습했던 캘리 문구를 감성 공장 앱의 멋진 사진들에 얹어 만든 자료들로 필사 글을 쓴 적이 있다. 그 글을 블로그에 올렸는데, 온라인 필사 톡방에서 함께 필사하고 있는 한 필친(필사 친구)께서 내 캘리 글씨체가 자기가 다니는 화실 선생님 글씨체 같다고 하셨다.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캘리 고수이신 그분이 올리는 캘리 문구 관련 글을 보며 매번 감탄하고 부러워하던 중이었는데.
"설마 화실이 일산에 있는 건 아니겠지요?ㅎㅎㅎ"
나도 이렇게 대댓글을 달면서 농담을 건넸는데, 그분이 "일산 맞아요!" 하셔서 깜짝 놀랐다. 그것만도 놀랄 일이지만 일산에 화실은 많다. 설마, 했다.
"전 000 캘리공방 다니는데, 설마 거긴 아니죠?"
한 번 더 농담을 던졌는데 그분이 "맞아요!" 하시는 것이었다.
전국구로 모여 있는 회원이 100명도 넘는 온라인 필사방에서 같은 캘리 화실에 다니는 분을 만나게 될 줄이야! 캘리그래피가 연결해 준 놀라운 연결고리였다. 특정한 글씨체만으로도 서로 얼굴 모르는 사람들이 이어지다니, 너무 신기했다.
캘리 글씨를 쓸 때 기본은 낱글자끼리 최대한 붙여 쓰는 것이다. '낱말'이 아니라 '낱글자'다. '행복한 하루'라는 어구에서 '행복'이나 '하루'는 낱말이고 '행'과 '복', '한' 등은 자음과 모음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낱글자다. 낱글자를 붙여 쓰되, 서로의 글자가 부딪히면 안 된다. 가깝되, 선이 겹치면 아름답지 않다.
그다음 기본은 '끼워 쓰기'다. 행을 달리해 글을 이어 쓸 때, 아랫 글자를 윗 글자들의 빈틈에 채움으로써 조화와리듬감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 부분이 일반 글씨체와 캘리 글씨체가 구분되는 가장 큰 지점이지않을까?
우린 줄공책 줄에 딱 맞춰 윗 칸과 아랫 칸의 글씨들을 일정한 간격을 유지하며 써야 바른 글씨로 알고 써왔다. 그런데 캘리 글씨는 윗 칸과 아랫 칸의 적절한 빈 공간에 제대로 끼워 써야 미적인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낱글자끼리는 가깝게 쓰되 충돌하지 않으며, 행을 달리해 쓸 때 빈 공간에 끼워 넣음으로써글자들이 전체적으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게 하는 것. 어쩌면 캘리그래피는 인간관계와 이리 흡사할까.
가까운 사이라고 함부로 선 넘지 않으며,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줄 수 있는 관계는 건강하다. 늘 신경 쓰지 않으면 건강한 관계 맺기는 쉽지 않다. 한 획, 한 획 정성 들이지 않으면 균형감을 잃는 캘리그래피처럼.
먹물로 쓰는 붓캘리는 묵직함이 있고 더 다채롭게 표현할 수 있답니다.(먹물 붓캘리 by 정혜영)
내친김에 11월에 있을 캘리 2급 자격증을 따려고 요즘 붓캘리에 도전 중이다(캘리 자격증 시험에선 붓캘리로 심사합니다). 붓으로 쓰는 캘리는 일반 붓펜과는 다른 묵직함이 있다. 학창 시절에 붓으로는 선 긋기 하나도 힘들었던 것 같은데, 붓펜으로 계속 연습해서인지 걱정에 비해 나쁘지 않다. 붓캘리 처음 하는 것에 비하면 잘 쓴다는 화실 선생님의 칭찬 한마디에 오늘도 내 붓은 춤을 춘다.
흥에 겨워 춤추다 보면 나만의 춤선이 생길 것이다. 언젠가 내 글씨체를 갖게 되는 날, 난 정말 춤을 출 테다.
결국, 잘 해낼 거다. :)
좋은 말을 정성들여 쓸 때 밀려오는 행복, 캘리그래피의 신세계랍니다. (쿠레타케 붓펜 캘리그래피 by 정혜영, 배경 사진 출처: 감성 공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