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혜영 Dec 03. 2020

햇반 예찬

마가린 간장밥의 추억  


  햇반을 전자레인지에 데운다. 2분이면 충분한데 나는 모락모락 피어나는 뜨끈한 밥을 먹고 싶어 10초를 더 데운다. 이때의 10초는 큰 차이를 만드는 시간이다.


  내가 햇반을 먹는다니, 내 동료 중 하나는 나를 손에 물 많이 안 묻혀본, 있는 집 안주인쯤으로 여겼나 보다. 코로나로 인해 거리두기 단계가 한창 높았던 시기에 모여서 먹는 급식이 중단된 적이 있었다. 외부 배달 음식도 금지해서 어쩔 수 없이 도시락을 싸서 출근하게 되었을 때, 집에 있는 반찬을 서로 챙겨 오기로 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 연구실에 반찬을 늘어놓으면 한 사람씩 뷔페처럼 덜어가 먹었다. 그때 모처럼 '어른'들만을 위한 반찬을 만들었다. '들기름 깻잎조림'이나 '무말랭이 무침', '마늘종 조림', '명란 계란찜' 등과 같이 집에서는 만들어 놓으면 나나 먹는 반찬들을 만들어 가니, 한 동료가 깜짝 놀라 했다. 평소에 내가 밥 안 하고 햇반을 먹는다고 해서 요리를 잘 못하는 줄 알았다는 거다.  

  밥 하기가 싫다는 것이었지, 반찬 만들기가 싫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던 모양이다.


  난 밥하는 게 싫다. 정확히 말하면 허기진 상태로 한 끼 식사에서 절대로 생략해서는 안될 음식인 밥부터 시작하는 게 싫은 거다. 따뜻한 음식을 한 가지 이상은 꼭 해서 먹어야 하는 나는, 식사 준비의 시작을 밥부터 하면 밥이 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과정이 너무 지난해지는 것만 같다. 퇴근길 지치고 허기진 나를 위해 기다릴 필요 없이 차려주시던 엄마의 저녁상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 다시 말해 무엇하랴. 주말이라면 남편이 해 주기도 하겠지만, 내가 먼저 퇴근하는 평일에는 내 손이 닿지 않으면 알아서 저녁상이 차려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난 햇반이 좋은 것이다. 너무 피곤해서 정말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나, 요리하는 시간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고픈 아이들을 위해 햇반 하나 2분만 후딱, 돌리고 계란 프라이 몇 개 해서 김과 김치만 내어 놓아도 섭섭지 않은 한 끼 식사가 되어주니 말이다. 막 데운 햇반에서 올라오는 뜨뜻한 김과 고슬고슬한 밥알은 이제 막 한 밥, 딱 그 맛이다.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지 않았다는 것이 이상 정도로 어릴 적에 지지리도 못살았다. 지금 같으면 창피해할 법도 한데, 부엌 하나 딸린 단칸방에 살면서도 난 친구들을 집에 데리고 와서 노는 게 좋았다. 엄마가 일을 나가시고 안 계신 집에서는 그 공간의 제일 큰 어른(?)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우쭐했던 것이었으리라. 엄마의 부재 시, 동생들을 건사하며 지내야 했던 맏이라서, 나는 국민(초등) 학교 4학년 때에도 밥을 할 줄 알았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신나게 놀다 보면 신진대사가 빠른 시기의 아이들이어서인지 금방 배가 고파졌다.


  그러면 가스레인지도 없던 부엌에서 석유곤로 위에 잘 씻은 밥을 안쳐 밥을 했다. 곤로 불의 강약을 맞추는 일이 쉽지 않았을 텐데, 어찌 그 나이에 그렇게 잘할 수 있었는지 그 시기의 내가 대견하다. 그렇게 뜸을 들여 밥이 될 때 피어나는 밥 냄새로 동생들과 친구들이 참을성의 한계에 다다랐을 즈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흰 밥을 밥공기에 담아내면 그것만으로도 다른 반찬이 필요 없을 정도였다.


  그래도 우리는 서두르지 않고 나름 럭셔리한 방식(?)으로 밥을 먹곤 했는데, 숟가락으로 뜨거운 밥 가운데를 옴폭 파서 마가린 한 숟가락을 심은 뒤 밥으로 덮는 것이었다. 그렇게 밥공기 속 밥 전체에 마가린이 녹아 스며들게 한 후, 밥 위에 간장을 살짝 두른다. 그러고 나서 숟가락으로 잘 비비면 마가린 먹은 밥과 짭조름한 간장의 콜라보가 만들어내는 그 맛, 그 기름진 고소함은 먹어본 사람만 아는 맛이다.


추억의 마가린 간장밥




  요즘은 매일 먹게 되는 기름진 음식에 질려 오히려 담백하고 깔끔한 음식을 찾게 되다 보니 그 시절 먹었던 마가린 간장밥을 먹을 일이 없다. 그래도 방금 한 밥이나 이제 막 돌린 햇반의 온기와 함께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음식이긴 하다.


  햇반을 돌렸더니 또 기억 속에 그 밥이 소환된다. 햇반이 주는 신속성과 편리성, 그것으로 인해 위로받는 나의 마음을 쓰려했는데, 쓰다 보니 마가린 간장 비빔밥 예찬이 되어 버렸다. 그래도 어떠랴, 따뜻한 햇반 한 그릇으로 어린 시절 소중했던 추억을 소환했으면 그것으로 햇반, 너의 역할은 오늘도 다한 것이다.

햇반, 오늘도 땡큐!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위로하는 음식, 베트남 쌀국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