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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혜영 Dec 20. 2020

중산층이 되고 싶어 악기를 배웠다

'문화의식'이 기준인 프랑스의 중산층 조건


언젠가 이웃 블로그에서 여러 나라의 '중산층의 조건'에 대해 비교한 내용의 글을 본 적이 있다.

기억이 분명치 않아 다시 찾아보니 다음과 같이 제시되어 있다.


출처: 바나나 꿀단지 블로그


대한민국의 중산층 조건에 부채 없는 30평대 아파트, 2,000cc급 중형차, 1억 원 이상의 예금 잔고 등 경제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그에 비하면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중산층의 기준은 우리와 사뭇 다른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발췌 기준이 우리나라는 직장인 설문이고, 다른 나라들은 일정한 공통 기준이라는 점에서 직접 비교하는 것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래도 이 이웃 블로거가 신문사 뉴스에서 인용한 내용임을 감안하면, 그만큼 우리나라 직장인들이 '중산층'에 대한 기준에서 어떤 면을 중시하고 있는지 참고할 만하다.

상대적으로 프랑스 중산층의 조건이 눈에 들어왔는데, 할 수 있는 외국어 한 가지 이상, 직접 즐기는 스포츠, 다룰 줄 아는 악기, 심지어는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까지, 중산층을 바라보는 의식의 차이가 확연함을 알 수 있다.

 

이 웃픈 글을 보고, 제일 먼저 든 생각은, 내가 우리나라에서 중산층으로 살기는 어렵겠구나,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든 생각이, 그렇다면 대한민국 안에서 프랑스 중산층 조건에 맞는 사람으로 살아보자, 는 것이었다. 대한민국 직장인이 생각하는 중산층 조건이라면 애초에 포기해야 할 것 같고, 프랑스 기준이라면 도전할만하다고 생각했다. 도전할 만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는 쪽이 더 맞는 말이겠다.


일단, 첫 번째 조건인 외국어는 서바이벌 잉글리시 정도는 되니 충족되었다고 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라면 약간 애매하긴 하지만, 운동을 좋아해서 이런저런 운동에 손을 댔다 뗐다 하고 있으니 그것도 된 것으로 칠 수 있겠다. 요리야 남들과 다른 맛이던, 같은 맛이던, 할 줄 아는 게 있으니 그것 역시 내 맘대로 충족된 것으로 치고. 그런데 '다룰 줄 아는 악기' 부분은 아무렇게나 퉁치기 어려운 조건이었다. 초등학교 때 배웠던 리코더를 악기라고 하기에는 좀 많이 부끄럽지 않은가.


내가 어렸을 때 엄마 혼자 아이 셋 키우느라 힘들게 생계를 꾸리시는 집안에서 악기라니, 언감생심이었다. 그래도 사춘기가 시작될 무렵인 6학년 때 다른 교과목 시험은 혼자 공부해서 점수를 낼 수 있었는데, 음악 시험 문제는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지금 돌아보면 학교에서 제대로 가르쳐 주지도 않은 음악 이론들로 문제를 내다니...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애들이나 점수를 받을 수 있던 시험이었으니, 피켓팅 시위라도 해야 할 판이었지만, 그때야 그런 걸 알 리가 있나. 아무튼, 그게 너무 분해서 돈 없는 엄마를 졸라 피아노 학원을 3개월간 다녔던 것이 나의 학창 시절, 악기라는 것을 그나마 건드려봤던 경험의 전부였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이제는 좀 해도 되지 않을까, 하고 아르바이트 한 돈으로 기타 좀 배워보겠다고 했다가, 대학 등록금도 겨우 대는 형편에 졸지에 '정신 빠진' 딸, 언니 취급을 하는 식구들 눈치가 보여 그때도 손을 못 댔다. 취업한 후, 이제 내가 번 돈으로 악기 하나 배워보자고 다시 시작했던 피아노는 3개월을 다니는 동안 도대체 이런 속도로 언제 노래 한 곡 쳐 볼 수나 있겠나, 싶어 그만두었고, 동료 한 분이 가르쳐 주는 플루트 모임에 들었다가 소리 내는 것조차 힘들어서 그것도 얼마 못가 그만두고 말았다.

 

역시, 악기는 어렸을 때 배우지 않으면 어른이 되어 배우기엔 너무 어려운 것이었다. 그래서 내 아들, 딸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여러 악기를 접할 기회를 주려고 했다. 어릴 때 배우지 않으면 나처럼 어른이 되어서 계속 미련만 남을까 봐. 아이들이 연주하는 곡을 들으며 나도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악기를 다룰 수 있다면 삶이 얼마나 풍요로울까, 하며 부러운 마음 가득했었다.


그러다 3년 전 겨울, 방학에 들어가기 전에 우쿨렐레와 오카리나 연수를 신청하고 그 해 겨울방학 동안 각 30시간씩 60시간짜리 기초 과정을 배우게 되었다. 그때 만난 오카리나는 이후 내 인생 악기가 되었다.

우쿨렐레보다는 오카리나가 온전한 한 곡을 연주하기에 좋은 멜로디 악기였고, 언제 어디서든 들고 다니며 연습할 수 있도록 작은 악기의 사이즈도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소리가 너무 예뻤다. 처음 배울 때야 호흡과 텅잉이 제대로 되지 않으니 당연히 예쁜 소리를 내기 어려웠지만 강사 선생님들이 들려주시는 아름다운 소리에 홀딱 반해 버린 것이다. 무엇이든 강하게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어야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생기는 법. 그렇게 나는 오카리나에 빠져 3년 동안 계속 함께하고 있다.

한국식 오카리나 연주 감상: <여러분>, by 김준모(오카리니스트), 알토 오카리나 연주


처음엔 저학년 아이들을 가르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자 시작했던 악기였는데, 보통 아이들이 배우는 이태리식 오카리나가 아닌, 한국식 오카리나를 배우면서 이제는 아이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연주하게 되었다. 기분이 좋을 땐 흥겨운 곡을, 우울할 땐 차분한 곡을 연주하며 내 마음을 달래고 위로할 수 있는 악기가 생겨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그렇게 오카리나와 친구가 된 지 3년째. 작년에는 1년 동안 2학년 우리 반 아이들을 틈틈이 가르쳐 학예회에서 반 전체 학생들과 함께 연주 발표도 했는데,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입으로 부는 악기를 일체 할 수 없게 되어 너무 아쉽다. 오카리나를 함께 하는 교사들 협회에서 1년에 한 번 정기연주회를 여는데 올해는 그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아쉬운 마음에 12월 말에 랜선 음악회를 열기로 하고, 모두 함께 한 곡을 연주하는 영상을 만들기 위해 각자가 연주 동영상을 찍어 협회에 보냈다. 사람들이 만나야 연주하는 맛도 나고, 피드백도 받을 수 있는데 여러 모로 아쉬운 한 해이다.

  

50세 이전에 만난 오카리나 덕분에 프랑스의 중산층이 되리라는 소망에 더 가까워졌다. 아들의 피아노와 딸의 플루트에 맞춰 함께 연주할 수 있는 나만의 악기가 있다는 것은, 내 인생 최고의 행복이다. 100세 시대라는데 10년 정도 연습하면, 나도 '오카리니스트'라는 페르소나를 추가할 수 있지 않을까. 연습할 때마다 필연적으로 내게 되는 아름답지만은 않은 소리들을 갈고 다듬어 진정 아름다운 완성형의 소리 내기. 이것이 내가 꾸는 꿈이다.


프랑스의 중산층이 되고 싶다는 소망에서 출발했는데, 이제는 내가 행복하고 만족하는 삶의 모습으로 방향을 잡아도 될 것 같다. 중년에도 꿀 꿈이 있어서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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