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뢰의 가치를 신뢰하는 가치
내가 풀고 싶었던 문제: 게임 세계에서 어떻게 경제 환경을 안정적으로 구축할 것인가?
처음에는 게임 내 아이템(재화)의 가치를 측정하는 통계량을 알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기에 게임에서의 특수성(제한사항)을 고려하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아래와 같다.
Y: 게임에서 공급(생산)할 수 있는 아이템과 효용 합
C: 유저들이 소유하고 있는 아이템의 효용 합
I: 기업의 투자. 예를 들면 기계설비 구입, 공장 증설 등이 이에 해당한다. 게임에서는 아이템을 강화하기 위해서 쏟아부은 돈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게임에서 I가 중요한 이유는 현금으로 게임 내 재화를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하 현질) 즉 유저가 무한하게(현실의 자금력만큼) I를 공급할 수 있는 세계다. 그리고 이 세계의 정부는 유저(개인)가 엄청난 부를 독점하고 있고 어떻게 투자를 많이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G: 정부가 어떻게 지출할 것인가. 즉 게임사가 어떻게 이벤트나 퀘스트로 아이템 보상을 줄 것인가?
NX: 닫힌 경제. 처음에는 유저의 현질은 수입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수입은 재화의 이동이 있고 그로 인한 화폐, 가치의 유입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아이템을 게임 세계 밖으로 가져나갈 수는 없다. 그렇기에 경제는 닫혀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처음에는 이렇게 현실 경제에서 통용되는 기존 거시경제의 틀을 따라서 게임을 해부하려고 했다. 하지만 저런 세계는 현실에서 어느 정도 안정상태에 들어간 상황에서만 먹히는, 즉 특수한 맥락에서의 해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 더 앞 단계의 질문을 던져야 했다.
앞의 질문은 게임에서 경제 생태계가 형성이 된 상태에서의 지속되는 규칙을 찾기였다. 생태계가 형성이 되었다는 전제가 있었다. 그러면 한 단계 상위 질문은 어떻게 하면 경제가 형성되고 발달할 기초를 얻었는가를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이를 고민하던 중 돈의 역사 특강에서 질문을 했다.
Q. 게임 가상세계에 경제 신뢰를 줄 것인가?
A. 금본위제 형성 이유를 살펴보라. 화폐의 특징을 살펴보라. 가치 측정 가능, 교환 가능, 저장 가능, 보존 가능 등의 특징이 있다. 이는 하나로 귀결된다. 화폐 사용자들에게 신뢰를 준다. 그래서 발전한 나라는 안정적인 화폐를 가지고 있다.
내가 돈의 역사 특강에서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은 경제 생태계가 형성되는 초기의 모든 것을 관통하는 답변이었다. 실은 답변을 듣는 순간에는 굉장히 어색했고 어리둥절했다. 어떻게 신뢰를 주는가를 물어봤는데 돈이 가져야 할 속성을 답으로 들었다. 처음에는 '내가 질문을 개떡같이 했구나(개떡같이 한 것은 사실이다)'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홍박사님은 이 개떡을 뚫어보고 훌륭한 답변을 주셨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런 질문 한두 번 받아본 게 아닐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기계적으로 현상을 관통하는 답변을 주실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답을 곱씹었다.
그래서 왜 화폐가 가져야 하는 특징을 설명해 주셨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화폐가 가져야 할 특징은 화폐 스스로가 왜 갖추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니 경제에 신뢰를 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 중 가장 기본 요소가 화폐였던 것이다. 경제를 지금처럼 일괄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이유는 공통된 화폐와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시장 참가자들에게 일관된 기준을 제공하고 가치를 축적할 수 있도록 했다.
신뢰의 가장 보편적인 기준이 화폐였던 것이다. 화폐의 특징을 설명해주신 이유는 신뢰를 구축할 수 있는 가장 보편적이고 빠른 수단이었던 것이다. 화폐(혹은 화폐를 대용할 재화)가 생긴 이후에 호가가 생긴다. 호가를 부르는 것이 반복되면서 '시세'가 측정이 된다. 내가 고민했던 교과서에서 나오는 경제이론들은 대부분 화폐가 있었기(혹은 가치 측정이 가능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화폐에 대한 신뢰와 안정성을 기반으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화폐는 무엇일까? 단순히 게임상의 gold가 전부는 아니라는 것을 게이머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한 때 열렬한 게이머였던 도연님께서 이번 특강이 끝나고 이번 씽큐베이션 서평 글감을 얻은걸 공유해주셨는데 나도 슬쩍해서 써본다.
디아블로2 오리지널에서 왜 조단링이 중요했는가? 모든 유저들의 거래 매개 수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화폐가 되었기 때문이다. 모든 유저가 어떤 목적으로 인해서 화폐로 인식하기 시작했을까? 마치 고대 로마시대의 소금과 같은 역할이었던 것이다.(TMI. Salary, Soldier이라는 단어가 소금을 의미하는 라틴어 'Sal'에서 나왔음, 출처) 모든 캐릭터가 조단링을 장비해도 잘 어울렸다. 특히 마법사류의 캐릭터에게 필수적인 아이템이었다. 그래서 조단링이 화폐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 모든 유저가 가치를 인정하고 공통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부수적으로 아이템이 차지하는 공간도 적고 가치도 비교적 높은 편이었다.
하지만 조단링에서 왜 독참으로 화폐가 바뀐 것인가? 디아블로2의 확장팩이 나오고 룬 조합 아이템이 나오면서 조단링의 권위가 약해졌다. 그리고 아이템 복사 버그로 시장에 복제된 조단링이 공급되기 시작한 것이다. 위조화폐이지만 위조인지 알 수도 없었다. 신뢰가 무너진 것이다. 거기에 서버를 롤백하기도 하는 등의 일이 추가되며 정부(게임사)에 불신이 확산되었다. 결국 조단링 화폐시장이 몰락하였고 대안으로 나온 것이 독참이었던 것이다.
즉 화폐의 기본 바탕에는 신뢰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 금본위제는 왜 성행할 수 있었는가? 금은 화폐가 갖춰야 할 특징들을 잘 갖추어서 시장에서 신뢰가 형성되었다. 그러면 달러는 왜 기축통화가 될 수 있었는가? 미국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돈은 신뢰를 가장 잘 표현하는 수단인 것이다. 또한 역의 관계도 어느 정도 성립한다. 신뢰를 바탕으로 화폐가 생겼지만 생태계의 구성원이 생태계를 믿는 정도를 화폐에 대한 신뢰도로도 이해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여담으로 생태계의 구성원이 구성원 간의 신뢰를 보여주는 방법으로, 구성원 모두가 신뢰하는 가치를 다른 구성원에게 주는 행위이다. '신뢰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돈(계좌)으로 보여주는 것'이라는 신영준 박사님의 말을 돈이 가진 가장 큰 특징인 신뢰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서 돈은 중요하다. 그래서 신뢰는 더 중요하다.
그래서 게임에서 신뢰를 어떻게 줄 것인가?
간단하다. 유저에게 믿음을 주어라.
어떻게 믿음을 주냐고?
그건 다음에.
질문은 가장 작은 발표이다. 올해 여러 목표 중 하나가 대중 발표하기 6번이다. 목표인 이유는 내가 그만큼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강연을 보러 가기 전에 책을 읽고 질문을 정리하고 있었는데 질문이 완성되지 못했다. 질문이 완성되지 못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아직 생각을 덜 했다. 무엇이 궁금한지 명확하지 않았다. 어떻게 게임이라는 특수성(독제 국가, 무역 없음, 개인(기업)이 부를 독점한 세계 , 즉각적인 정부 재정 정책 가능, 중앙은행 없음, 거래 코스트 없음, 무한 기술 혁신 가능 등)을 가진 상태에서 경제 안정성을 형성할 것인지 묻고 싶었다. 하지만 짧은 시간에 명확히 전달할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옳은 질문인가 라는 것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강연이 끝나고 질문도 거의 끝나갈 무렵, 옆에 앉은 우리 팀 위경님이 질문 안 하실 거냐고 물었다. 실은 안 할 거라고 답변했다. 그리고 안 하려고 했다.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한지 스스로 명확하지 않은 상태에서 질문하는 것을 꺼려하기 때문에 안 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무슨 바람이 분 걸까? 마지막 질문이라서 그랬던 걸까? 나도 모르게 손을 들고 마이크를 받아 들었다. 평소에 안 하던 미친 짓을 한 것이다. 그렇게 질문을 했다.
질문하는 상황을 복기하면서 나는 너무도 부끄러웠다. 첫 번째로, 매우 건방진 태도로 질문을 했다. 일어나서 질문을 하다가 머리에서 질문이 정리가 되어있지 않아서 노트북에 써놓은 글들을 본다고 슬쩍 자세를 굽힌다는 것이 그만 의자에 걸터앉아버렸고 그렇게 끝까지 질문을 했다. 두 번째, 질문 자체도 횡설수설했다. 소중한 기회에 명확히 의사전달을 하지 못했다. 세 번째, 나의 이익에만 국한된 질문이었다. 앞서 나온 질문들은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만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내 질문은 그렇지 않았다. 다수가 공감하고 상황에 어울리는 좋은 질문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기적이었다. 내가 인지하기 전 행동하는 순간 본능적으로 이기적으로 행동하는 언행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번에도 그런 행동이 나왔다. 이것이 나를 가장 아프게 했다. 그리고 이렇게 반성하고 있다. 그리고 이 글을 빌어서 홍춘옥 박사님을 비롯한 강연 참가자들에게 죄송하다고 말하고 싶다. 죄송함은 다른 형태로 신뢰 있게 표현하도록 하겠다.
물론 큰 기회비용을 지불한 만큼 얻은 경험도 있었다. 첫 번째, 준비되지 않은 기회를 맞이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다시 한번 느꼈다. 빡독 스피치를 통해서 철저히 느꼈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니었다. 나는 아직도 모자란 우물 안 개구리였다. 다시 삶을 정비해야 했다. 두 번째는 대중 앞에서 준비 없이 말한 경험을 쌓았다는 것이다. 나의 가장 밑바닥 본 실력을 알게 되었다. 즉 나의 생각의 질문 깊이에 대한 메타인지가 높아졌다. 나는 복잡하게 생각하는 척, 현실과 가상세계를 연결하는 척하면서 이해하는 흉내를 내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 그래도 신뢰의 가치에 대해 한 번 더 경험하게 되었다. 홍박사님이 나의 개떡 같은 질문에 찰떡같이 대답해 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그래도 이렇게 반성할 수 있었다. 네 번째, 불편함을 이겨낼 수 있었던 유대의 힘을 느꼈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았을 일에 도전하게 해 준 씽큐베이션, 대교에 너무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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