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트레스의 힘 - 켈리 맥코니걸
예전에 쓴 카카오스토리 글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의 첫 번째 전성기, 나의 다섯 번째 전성기. 내가 봐도 너무너무너무 귀엽다. 진짜 전성기 시절이다.(내 자식들은 나보다 더 이쁘겠지.)
전성기였던 저 때로, 혹은 가장 행복했던 과거로 돌아가고 싶냐고?
아니, 전혀.
서른두 살의 나는 서른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어느 순간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은가? 혹시 단순히 저 시절의 내가 되고 싶다기보다,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서 유연하게,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으니까.
예를 들면 그럴 수 있다, 누군가 소중한 사람을 살리기 위해서 돌아가고 싶다고. 하지만 시간을 돌려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일이 벌어지지는 않는 것이 자연스럽다. 로또 번호를 맞출 수 있을 것 같은가? 강남 집값이 오를 것 같은가?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세상과 똑같이 흘러가지 않으리란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다. 영화 '나비효과'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내가 형성되는 데 노력한 나의 시간과 나의 세계에 감사하다. 그리고 지금의 기억과 상태를 유지한 체로 시간을 돌린다고 하더라도, 지금 세계와 시간을 돌린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그리 차이 있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내 세계는 나로부터 이해되는 세계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앞으로의 시대가 더 궁금하기 때문에 가장 미래에 가까운 이 순간을 선택하겠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이렇듯, 나는 내가 형성된 나의 세계를 가장 가치 있게 생각한다. 그럼 어떤 순간들을 통해서 내 세계를 소중하게 여기기 시작했고, 내 세계가 조금 더 나은 순간으로 발전했는가? 환경의 변화가 있었을 때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은 순간들이 나를 발전시켰다.
니체는 나를 죽이지 못하는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말이 떠오른다. 진부하다. 그래도 나의 생각이 이 말과 비슷한 맥락이다. 하지만 더 구체적인 것을 이야기하고 싶다. '강해진 나'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냥 우연히 함께 따라온 결과물 같은 것이다. 스스로에게는 그때의 경험이 더 소중하다. 그래서 나는 최근에 겪은 자아가 무너져 내리는 그 막대한 스트레스 순간을 한 번 복기해보고 그 이야기를 공유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내 칠판에 선명하게 기록된 단어: 2019년 02월 16일 대참사, 대성통곡
저 날은 내가 올해 목표로 한 대중 발표를 두 번째로 했던 날이었다. 체인지 그라운드에서 주최하고 대교에서 후원하는 빡독(하루 종일 책 읽고 강의 듣는 프로그램) 행사에서 스피치를 했었다. 스피치 과정에서, 끝나고 반성을 하는 과정에서 큰 충격을 받았었다. 큰 스트레스를 받았다.
빡독은 신청하는 순간부터 뽑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이 있었다. 왜냐하면 내가 뽑는 사람이라면 나를 뽑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이다. 빡독 신청서를 작성할 때 나는 스피치 스크립트와 스피치 소재인 분석 결과물을 함께 제출했다. 빡독 신청서에 고민을 작성하는 곳이 있었는데 거기 빡독 스피치 링크를 올렸다. 그래서 빡독에 뽑혔다. 그리고 스피치 참여를 원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스피치 초안을 보내라고 안내받았다. 그때 나는 스크립트를 업그레이드하고 PPT를 만들어서 보냈다. 그리고 그때부터 출퇴근을 하면서 중얼중얼 스피치 연습을 했다. 그리고 나는 스피치 할 기회를 얻었다는 안내를 받았다.
아니, 떨어질지도 모르는데 성급한 거 아닌가? 만약 떨어졌으면 어쩌려고? 그래도 실은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 포트폴리오가 하나 완성이 되는 것이었고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른 곳에서 발표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즉 하방은 견고한데 상방은 열려있었다. 최소한 내가 이득, 운 좋으면 서로 윈윈 할 수 있는, 잡아야 하는 기회였다.
나의 빡독 스피치 순서는 여섯 번째였다. 오전에 4개의 스피치가 진행되었고 오후에 3개의 스피치가 진행되었다. 오전에 스피치를 들으면서 나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다. 준비한 스피치에서 앞의 스피치와 겹치는 부분도 있었고 너무도 훌륭한 스토리텔링들이 즐비해서 내 스피치는 도저히 앞의 스피치 이상의 퀄리티가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스피치의 큰 틀을 바꾸기에는 시간이 없었고 할 수 있는 바를 준비하려고 했다.
일단 점심시간, 저녁시간을 활용했다. 식사를 빠르게 끝내고 강단에 올라가서 혼자서 독백으로 타이머를 켜 놓고 연습을 해봤다. 100명의 사람들 앞에 선다는 것은 문자 그대로 공포스러운 경험이다. 연습할 때 사람들이 20-30명 정도밖에 차있지 않았는데도 압도되는 느낌이 들었다. 실은 앞에 나가기 싫었다. 어차피 스피치는 자동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이미 연습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문단을 바꾸고 앞선 스피치에서 언급된 내용을 빼면서 수정한 스피치를 연습하는 것이 지금 할 수 있는 최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점심시간은 어떻게든 연습했다. 하지만 저녁시간에는 악마의 속삭임이 들려왔다. '점심때 연습했잖아. 저녁시간에는 나가서 연습하는 것보다 천천히 앉아서 마음을 가라앉히는 게 어떻겠어?' 마음이 편해왔다. 그리고 뭔가 이상한 감정을 느꼈다. 감정 인식하기를 매일 연습하고 있는데 감정의 괴리가 발생할 때의 느낌이 그대로 몰려왔던 것이다. 스스로 합리화하는 과정이 일어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녁시간도 연습했다. 어차피 강단에 서서 돌아다녀도 나에게 관심 가질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다. 세상은 생각보다 스스로에게 무심하니까. 그래서 점심때 2번, 저녁때 2번 강단 위에서 혼자 나지막한 목소리로 연습했다.
그리고 마침내 스피치를 발표할 시간이 되었다. 솔직히 내 앞의 스피치는 무슨 말인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나는 건 다섯 번째 분이 발표하러 나가기 전에 그분에게 "파이팅!" 해 준 것 밖에 기억이 안 난다. 돌이켜보니 그분에게 해 준 것보다 나 스스로에게 하는 말에 가까웠던 것 같다.
그리고 나는 발표를 시작했다. 처음 자기소개부터 말이 꼬였다. 그래도 감정은 잘 일렁이지 않았고 연습한 대로 진행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주제로 들어가면서부터 스트레스 상황이 벌어졌다. 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사람이 내 눈에 띄였던 것이다.
아직도 어느 자리의 분인지 기억하고 있다. 그리고 그때의 그 공포감은 아직도 선명하다. 구체적으로는 고개를 좌우로 젓는 행동을 지속하고 있었다. 그렇다, 예상하지 않은 실전에서 책에서 언급한 트라이어 사회 스트레스 검사(Trier social stress test)를 한 것이다. 지독하도록 고통스러운 그 검사를!
10분의 순간은 영원과 같았다. 고통스러웠다. '왜 하필 지금 이 순간 나에게 이런 시련이 닥치는가'원망하기도 하고, '나도 내가 만든 모형과 가설의 한계점을 알고 있다고! 10분 안에 하려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이러는 거잖아! 그래도 그 와중에 발견한 의미를 공유하려고 하는 거잖아! 그러니까 제발 고개 좀 그만 흔들어!!'라고 마음속으로 소리 질렀다. 물론 입으로는 계속 발표를 해나갔다.
그러면서 스멀스멀 내가 숨겨놓았던 판도라 상자가 떠올랐다. 내게 있어서 정말 공포스러웠던 기억인 '해석학(Mathematical Analysis)을 이해하지 못한'의 기억이 떠올랐다. 나는 그 기억을 정말 악몽처럼 간직하고 있다. 무언가 하나를 끝마치지 못한 기억은 너무도 삶을 짓누르게 한다. 이번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LDA(Latent Dirichlet Allocation)를 이용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하지 못했고 아는 것처럼 포장해서 발표를 하고 있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의 악순환의 반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온 마음이 무너져 버렸다.
물론 마지막에 그분이 누구보다도 크게 박수를 쳐주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때 감정이 상해있었다. 그리고 이미 나는 탈진해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집에 돌아오면서 지하철에 앉아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얼마나 보잘것없는 나였는가. 그래도 조금 열심히 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나는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아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전화했다. 너무도 큰 이 슬픔을 나누고 싶었다. 슬픔을 나눈다고 현실이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아니다. 내 안에서 호르몬이 바뀐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버지에게 나의 실력 없음이 너무 슬펐다고 얘기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나에게 정말 뇌리에 깊숙이 박히는 말을 해주었다. "인생 그렇게 만만한 것 아니다. 그랬으면 누구나 다 성공했을 거다. 수십 년을 꾸준하게 살아야 경지에 오르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차갑게 현실을 직시하는 말이기도 했지만 나는 너무나 큰 위로를 받았다. 그래, 내가 너무 쉽게 생각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온 것이, 고작 몇 달 열심히 살았다고 모든 것이 바뀌는 거라면 그만큼 얕은 인생을 살아온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족의 힘을 다시 한번 느꼈다.
그래도 슬픔은 가시지 않았다. 전화가 끝나고 그날의 회고록을 쓰면서 나는 또다시 펑펑 울었다. 예전에 받았던 상처의 기억을 다시금 떠올렸다는 사실이 너무 슬펐다. 그리고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음에 가슴 아팠다. 가장 슬펐던 일은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싫었다. 잃어버린 10년은 바로 내 이야기였다고 생각했다.
울고 나니 좀 기분이 풀렸다. 온몸의 힘이 다 빠졌다. 기를 다 빨린 듯한 경험, 압도당한 경험을 했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나는 고개를 저었던 그분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나의 가슴속 판도라의 상자를 마주할 트리거가 되어주신 그분에게 진심으로 감사하다.
그렇게 조금 진정이 되고 나서 내가 나아가야 할 목록을 작성했다. 포트폴리오에 추가하기 위해서 코드 마무리를 하고 github에 업로드하기, 하용호 님이 말씀했던 것처럼 결과물을 slideshare에 배포하기, LDA 공부하기.
그렇게 나는 그 날 무지막지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가족의 연대감으로 스트레스를 버텼다. 그리고 감정을 진정시키고 나서 내가 해야 할 일을 작성했고 아픈 상처를 어루만지듯 하나씩 마무리를 지었다. 그렇게 마음속에 굳은살이 생겨나갔다.
그렇게 빡독에서 있었던 큰 사건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코드와 슬라이드를 정리하고 LDA도 다시 공부했다. 그렇게 치료가 완료되었다고 생각할 무렵 두 번의 행복한 순간들도 찾아왔다.
첫 번째는 멘토에게 정리한 결과물을 보여줬을 때 나의 결과물을 보고 너무 좋아해 주었다. 그리고 자기도 열심히 살아야겠다고 말해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한 영향을 주었다는 것 자체로 너무 행복했다.
두 번째는 신박사님이 나를 불러주었다. 신박사님이 당신이나 더 겸손해지세요. (feat. 진짜 왜 그럴까?) 영상에서 나를 불러주었다.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봤는지 모른다. 순수하게 너무너무 기분이 좋았다. 정말 어린아이처럼 막 웃었다. 러닝머신 위에서 유튜브 보면서 헤헤헤 거리면서 진짜 소리 내면서 웃는 미친 사람이었다. 그래도 좋았다. 그렇게 나는 꽃이 되었다.
그래서 세 달이 지난 지금 나는 해석학을 이해하냐고?, 아니 LDA라도 이해하냐고? 아니다. 3월에 공부했을 때는 그래도 얼핏 설명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설명을 못하겠다. 그래도 확실한 건, 전보단 나아진 내 모습이 있었다. 그래서 여전히 나는 그 짐을 내 마음속에 안고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반성을 열심히 하고 계획을 했어도 무언가 바뀌긴 했어도 그래도 철저하게 바뀌지는 않았다. 그래, 그렇게 대성통곡 한 날이었지만 크게 변하지는 않았다. 그게 인간이다. 충격을 받아도 당장의 나 자신이 즉각적으로 변하지 않는다. 그래도 이런 조그만 일상의 스트레스를 통한 반성과 조금 변화한 행동이 쌓이고 쌓이면 나라는 존재가 변할 수 있다는 믿음은 있다. 그리고 다시 공부하고 다시 이해하는 걸 반복하면 향상한다.
그렇게 나는 스스로 선택한 스트레스도, 환경이 강요한 스트레스도 전보다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32살의 나는 2019년, 올해가 나의 32번째 전성기이다.
그리고 난 알고 있다. 당신의 전성기도 나와 겹친다는 걸, 바로 올해라는 걸. 물론 남이 뭐라고 하건 상관없다. 자신의 마인드셋은 스스로가 정하는 거니까. 원효대사 해골물 이야기처럼, 스스로의 마인드셋을 결정하는 건 자기 자신이니까.
당신의 삶에 제새동기가 필요한가요? 빡독 스피치 같은 대중연설을 해보기를 강력하게 추천합니다. 대중 앞에서 벌거벗은 상태로 스스로를 온전히 바라볼 수 있는 순간을 잡으세요.
아래 링크는 당시 발표 영상입니다.
적자생존, 적는 자 살아남는다?!(feat. 데일리리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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