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좋아한다.
새로운 경험을 하는 걸 좋아한다. 새로운 장소, 새로운 공기, 새로운 사람, 새로운 음식. 그것 만큼이나 여행을 가서 나를 세상에 던져 놓고 다르게 바라보는 것도 좋아한다. 다른 환경에 노출되면 평소 행동이 씻겨져 나가고, 내 안의 진정한 자아를 관찰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비교적 혼자 여행을 많이 다닌 편이기도 하다.
하지만 지금은 좀 다르다. 여행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좋아한다. 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니다. 지금은 여행보다 좋아하는 게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보다는 여행을 다녀오더라도 내 안의 진정한 나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여행을 가기 전에는 돌아오면 무언가 바뀌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돌아오고 나서는 무언가 달라진 것 같기도 했다. 좀 더 나다운 삶을 사는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와서 어떤 것이 구체적으로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기억나지 않는다. 크게 바뀌었다면 분명 기억했을 것이다. 결국 여행으로 바뀐 것은 없었다. 좋은 추억이 남았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지만 나는 변하지 않았다. 경험의 누적은 있었지만 내면의 변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똑같은가? 그렇지는 않다. 스무 살 처음으로 혼자 길을 떠나던 그때와 지금의 나는 뭔가 같으면서도 다르다. 분명 가치관이 변했다. 그래, 가치관은 변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가치관 안에 나만의 정수는 무엇일까? 그 질문에 답변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하지 못했다. 정수를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기도 했다. 심지어 정수가 무엇인지 알 때도 현실의 일에 치여 내면의 목소리를 따르지 못할 때는 인지부조화에 휩싸였다.
그래서 자아를 찾기보다는 나를 둘러싼 환경과 습관을 변화하려 시도했다. 정상상태일 경우에는 괜찮았다. 내가 원하는 방향대로 내가 주도해서 성장하며 살고 있었다. 하지만 외적 충격에 자아가 휩쓸리고 나서는 열심히 쌓아 올린 환경이 무너져 내렸다. 단단한 벽돌집을 짓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 빠진 비틀거리는 젠가였다. 정상상태라고 생각했던 평온한 순간은 오히려 특이상황이었고 외부 충격이 있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다.
다시 나는 자아를 찾기 시작했다. 외부 충격에도 나만의 등대가 있으면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걱정이 되었다. 이번에도 못 찾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우연한 계기로 다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물론 앞으로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이 해결방법은 그것마저도 고려되었다.
<베스트 셀프> 책 소개에서 최고의 자아와 반자아가 존재한다고 들었다. 분명 나의 자아인데 내가 되고 싶어 하는 자아와 내가 되기 싫어하는 자아 두 가지가 동시에 존재한다니 의문이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표출되는 나는 즐겁게 일하고 성장하는 내 모습과 집안에서 뒹굴거리면서 유튜브를 보며 시간 낭비하는 내 모습이 둘 다 존재했다. 내 생각에는 전자가 내 이상적인 자아에 가깝다고 생각했지만 후자가 더 빈번했다.
<호모 데우스>에서는 머리를 맞은 것 같았다. 적어도 두 개의 서로 다른 자아, 경험하는 자아와, 이야기하는 자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실험적으로 증명한 사례다. 경험하는 자아는 순간순간 의식하는 자아이다. 이 자아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현실의 반응만이 존재한다. 이야기하는 자아는 순간을 인지하지 못하기에 행동의 지속시간을 구별하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고 한다. 즉 자아는 하나가 아니다. 나는 단수가 아니다는 말이 사실이었다.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는 자아는 허구적 이야기라고 설명한다. 자아는 우리 정신 안의 스토리텔러가 끊임없이 써 내려가는 신화라고 이야기한다. 유발 하라리는 자신의 세 권의 저서를 통해 상호주관적 개념(주관적인 개념이 다자간에 공감대를 이루는 인식, e.g. 돈, 국가, 종교)이 허구임을 밝혀낸다. 상호주관적인 개념은 깊게 생각할 때는 인식 가능하지만 인식하지 못할 경우에는 객관적이라고 판단한다. 그런 맥락에서 자아라는 개념 역시 상호주관적 실재이다.
상호주관적 실재인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이야기의 주인공 자체가 고통을 느끼는지 확인해보면 된다. 국가가 없어진다고 해서 국가는 슬퍼하지 않는다. 국가에 속한 국민이 슬퍼할 뿐이다. 자아가 무너진다고 해서 자아 자체가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자아가 변해가는 과정을 보고 고통을 느낄 뿐이다.
자아는 내가 행동의 주체로 자유 의지를 가진다고 말한다. 그럼 자유 의지는 무엇일까? 자유 의지가 자신을 욕망하는 것을 행동하는 것을 의미한다면 인간은 자유 의지가 있다. 하지만 자유 의지가 욕망하는 것을 선택할 자유라고 한다면 인간에게는 자유 의지가 있을지 의문이다. 우리의 욕망은 너무도 쉽게 환경의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기 힘들다. 우리의 생각은 기존에 우리가 속했던 집단 안에서 공용되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인지 개인이 스스로 생각해낸 것인지 구별하기 힘들다. 그래서 개인이 개인 관점에서 합리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경우가 발생한다. 우리는 집단 속에서 사고한다. 남들의 지식을 내 지식이라고 생각한다. 내 지식은 어디에 있을까? 글쎄 어느 것 하나 다른 사람의 지식이 아닌 것이 없다.
스스로 생각하기 힘든 인간은 나의 욕망이 공동체의 욕망인지 나의 욕망인지 구분하기도 힘들다. 욕망마저 스스로 선택하기 힘들기에 나의 행동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인지 의문이다. 게다가 욕망이 일어나는 메커니즘마저도 화학적인 과정에 불과하다. 내가 오른팔을 올리고 싶다면 몸 안에서 이미 생각하기도 전에 오른팔을 올리고 싶다고 신호를 보내고 있다. 내 욕망은 스스로 통제할 수가 없다.
나 자신이 경험한 것을 기반으로 내 자아가 생성된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마저도 진실과는 다를 수 있다. 경험은 모든 감각을 선물하지만 자아는 시각적이다. 우리의 자아는 나라고 하는 존재에서 얼마나 선택적으로 제한된 범위만을 수용하는지 알 수 있다.
자아라는 이미지와 경험적 이야기 속에서 나를 찾으려 할 수는 없다. 이야기는 허구다. 자아는 허구를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욕망을 통제할 수 없기에 자아가 생겨나는 것 역시 통제하기 힘들다. 그렇게 나의 자아는 변화한다. 내가 나의 본질이라고 믿어온 변하지 않는 자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기에 자아라고 믿어온 관념은 나 자신이라고 동일시하기 힘들다. 그래서 자아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그래서 항상 실패했던 것 같다. 언제나 자아는 존재했고 그 자아는 가변적이었다. 그것이 자아의 속성이었다.
이제 자아를 찾는 것보다는 나 자신을 이해하고 내 삶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경험하는 순간의 내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상태를 관찰하려 한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와 나를 동일시한다면 조작되고 착각하기 쉽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개인이 순간에 느끼는 감정을 바라보는 것이다. 특히 고통을 느끼는 순간에 집중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주관적 실재를 목격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기 관찰은 시간이 지날수록 힘들어진다. 인류의 이야기는 더욱 복잡해지고 있고 알고리즘은 우리의 욕망을 지배하고 있다, 점점 더 완벽하게. 욕망에 이끌려 우리는 가짜 이야기를 공짜로 접한다. 공짜일 경우 내가 소비자라고 생각했지만, 데이터 처리 프로세서로 노동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자아가 자라난다. 편견이 자라난다.
알고리즘의 세상이 도래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시간이 있다. 알고리즘이 우리의 삶을 편하게 해 준다는 명목 아래 우리의 정신을 결정하기 전에 스스로의 정신이 무엇인지 알고 싶다. 자아를 찾으려 내가 경험한 이야기 속을 헤매는 건 이제 끝났다.
그렇게 2019년 12월 01일 나는 자아를 찾는 것에 이별을 고했다.
Refere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