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 내 앞으로 끼어들었다

(x, y, z, ...) 벡터 인간, 그리고 관점 확장

by 경규승

가정에서, 교육기관에서 배웠지만 생각보다 현실에서 지키기 힘든 일들이 있다. 엘리베이터에서 이웃 만나면 인사하기, 전화할 때 내가 누군지 먼저 밝히기, 자동차를 타면 안전벨트 착용하기, 잘못했으면 사과하기, 양보하기 등. 그중에서도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이 가장 힘든 것 같다.


상대방을 전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럼에도 특정 상황에서의 상대를 상상해 본다면 이해하지 못할 행동이 가끔 이해되기도 한다. 급하게 내 앞으로 끼어드는 차 때문에 화가 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차 뒷좌석에는 발작을 하고 쓰러진 아이가 타고 있을 수 있다. 지하철 문이 열렸는데 내리기 전에 타려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 날 수 있다. 하지만 그 사람은 하루에 16시간씩 일하고 지하철로 이동할 때 잠깐 앉아서 휴식을 취할 수밖에 없는 사람으로 앉을자리가 절실할 수도 있다. 누구나에게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라고 하는 다른 차원에 나를 옮겨 상상하기에는 나 자신도 지치는 것이 다반사다.


이렇듯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힘든 행동이다. 나라는 존재에서 상대방이라는 존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차원 확장이 필요하다. 차원의 확장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이 될 것 같다. 첫 번째는 한 가지 차원은 스팩트럼을 가진다는 것, 두 번째 차원은 여러 가지 차원이 존재한다는 것. 이 글은 두 번째, 다양한 관점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려고 한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점만으로는 한계가 존재한다. 내가 판단하는 영역, 혹은 기준을 각각 하나의 차원이라고 생각해보자. 예를 들어서 나는 내가 어떻게 하면 체중을 감량할 수 있는지 알고 있다. 분명히 그 방법은 나에게 항상 먹힌다. 그렇지만 이 방법을 다른 사람에게 적용해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에게는 내 방법이 안 먹힌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내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을 나 스스로 증명해냈기에 내 방법을 내 세계에서 일반화 한 뒤 타인에게도 일반화해버린다. 그도 그럴 것이 나의 세계에서 관찰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대상은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라고 하는 닫힌 차원에서 사고하기 십상이다. 그렇기에 소통할 때 다른 대상을 고려하지 않으면 관념은 외로이 혼자의 세계에서 죽어간다.


상대방, 다른 사람과 소통을 하더라도 그 간극은 여전히 존재한다. 하지만 그 간극을 구체화시키다 보면 미지의 공간을 확인할 수 있고 그 공간을 상상력을 발휘해 구체화할 수 있다. 즉, 새로운 차원을 찾을 수 있다. 상대방이 그렇게도 말하던 관점일 수도 있고, 상대방도 나도 몰랐던 새로운 관점일 수도 있다.




사람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흐름 속에서 존재한다. 방향과 크기를 가졌다는 측면에서 벡터로서 존재하는 인간은 언제건 변화할 수 있다. 가소성이 있는 존재다. 또한 벡터로서 존재하는 사람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점에 따라서 벡터의 길이가 달라 보일 수도 있다. 위에서 바라보는 길이 1 짜리 벡터는 옆에서 바라보면 10일 수도 있다. 혹은 특정 관점에서는 0일 수도 있다.


또한 벡터의 시작점, 즉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서 결과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0,0)에서 시작한 사람과 (100,1000)에서 시작한 결괏값은 다르다. 분명 같은 노력을 들였어도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의 방법을 따라 한다고 해서 내가 성공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노력을 한다면 특정 차원을 분명 성장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은 내가 노력하는 일이 벡터의 어느 값에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히 알 수가 없다. 심지어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차원의 값이 변화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가소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수준에 따라, 자신이 인지하고 있는 차원에 따라, 노력의 결과물로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다시 말해 성공한 사람과 같거나 비슷한 차원을 인지하고 있을 수도 있고, 그 차원을 키우기 어려운 환경에 자신이 있을 수도 있다. 어쩔 수 없다. 누구나 벡터의 시작점은 다르고 인지하고 있는 벡터의 길이와 종류도 다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의 소통이 중요한 것이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를 통해 씨실과 날실이 춤을 추듯 얽히고설키면서 어느 순간 선들은 면이 되어버린다. 논쟁을 전쟁처럼 생각할 수도 있다. 이보다는 대화의 상대와 춤을 추듯이 호흡을 맞추면서 혼자서 표현할 수 없는 동작을 실현하는 것이 어떨까. 차이를 인정하고 복잡한 것은 복잡하다고 인정하고 서로의 관점의 경계를 확인하는 작업을 통해 차원은 확장된다. 서로의 관점은 유지될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렇게 통합된 지평에서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가능성이 넓어진다.




세계를 확인하려고 노력하다 보면 결국 내가 아는 것은 전부가 아니고 언제나 새로운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새로운 관점을 이해하는 것은 결국 내가 본래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시작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새로운 관점은 지금의 관점으로 해결되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이럴 경우에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한 가지 방법은 사유에 행동을 동원하는 것이다. 행동을 통해서 상대방과 세상에 답하는 것이다. 인생이 무엇인지 누구나 고민한다. 여기서 알아야 할 점은 내가 세상에게 인생이 무엇인지 물어본 것이 아니다, 세상이 나에게 먼저 너의 인생은 무엇인지 물어본 것이다. 내가 할 일은 행동으로 답변하는 것뿐이다. 그래야 대화가 이어진다. 그렇게 스스로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살아가는 것이다.


또한 새로운 관점을 받아들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내가 가지고 있는 관점을 다시 확인하는 것이다. 관점을 만든 대상은 개인이지만, 개인은 다른 생각의 틀에 휩싸여 버리기도 한다. 그 틀은 우리에게 사고의 구조물을 만들어 버렸고, 우리는 다시 이 구조물을 통해서 스스로를 형성한다. 되먹임 과정이 일어나면서 그 구조물은 의심도 품지 않은 상태로 점점 더 견고해진다. 천체와 지구의 움직임을 관측하기 위해 태어난 도구인 시간. 이제는 이 시간이라는 도구가 인간 삶을 지배하고 있다. 이렇게 인지하지 못하였지만 어느 순간 우리의 관념에 박혀버린 경우도 존재한다.




세상과 타인을 통해 자신의 관념을 확장시키자. 비슷한 관념이 공유되고 있으면 이를 공통적으로 인지한 상태에서 상대방과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상대방과 다른 관념을 확인하게 된다면 우리는 새로운 차원으로 사고를 확장할 수 있을 것이다. 비슷하지 않은 생각을 하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이 힘들 수 있다. 하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많은 것을 공유하고 있다. 그 상태에서 조금씩 다른 것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걸 수도 있다. 그렇게 우리의 벡터 합은 새로운 미지의 영역을 탐색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그런 역동적인 관계 속에서 우리의 관점은 확장되고 좁은 1차원 길에서 벗어나 헤르메스의 날개 달린 신발을 신고 날아갈 수 있을 것이다.




Reference.

<언플래트닝 - 닉 수재니스>

<질문은 왜 어려운가 성장의 조건 - 언더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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