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빨간 아이폰을 써

난 특별한 대중이다

by 경규승

얼마 전 누나네 놀러 갔었다. 다섯 살 조카는 만날 때마다 말이 늘어 있다. 조카와 대화하다 보면 흠칫 놀라기도 한다. 조카는 누나가 쓰는 고유의 단어를 말하고 있었고 정확한 맥락에서 구사했다, 정확한 표정과 톤으로 말이다.


나 역시도 아빠를 닮은 내 모습에 놀라기도 한다. 아빠의 시그니쳐 단어를 정확한 톤과 표정을 지으면서 따라 하는 걸 보고 소름 돋기도 한다. 이렇게 닮아가는 한편, 한 때 아빠와 같은 직업을 가지리라 생각을 했었고 결국 그 직업을 가졌지만 지금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같아지면서도 달라지고 있었다.


조카 역시 비슷할 것 같다. 지금은 누나와 매형을 따라 하는 걸 좋아한다. 매형을 따라서 일한다고 조카도 컴퓨터 자리를 만들었다. 한편 이렇게 누나네를 따라 하는 조카는 친구들 사이에서 돋보일 수 있는 왕자님 옷을 입는 것을 좋아한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라 보이고 싶은 것 같다.


신기하다. 같아지길 원하면서 달라지려 한다. 어떤 사람과는 같아지길 원하고 어떤 사람과는 달라지길 원하는 건 자연스럽다. 하지만 닮고 싶은 대상이 같은 사람일 때도 같아지면서도 달라지는 것이 동시에 가능하다. 아빠의 모습을 따라 하면서도 아빠와는 달라지길 원하는 내 모습처럼 말이다. 부모 자식 사이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본능적으로 같아지길 원하면서 달라지기를 원한다.




같아지길 원하는 건 우리의 DNA에 각인되어 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볼 때와 직접 같은 행동을 할 때 같은 세포가 활성화된다. 그렇기 때문에 타인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 해도 우리는 같은 행동을 할 준비가 된다. 공간이 트여있는 독서실에 들어가면 공부 외에 다른 행동을 하기 껄끄럽다. 나도 공부를 해야 할 것 같다. 그 공간과 집단의 일부가 되기 위해 타인의 행동을 인지해야 하는 순간 준비에 들어간다. 그렇게 함께 공명한다.


타인의 행동을 보는 것만으로도 우리가 행동을 한 것 같은 효과가 있다 보니 우리는 타인을 선택에 있어서도 타인을 의존한다. 타인의 선택을 문제 해결의 지름길로 활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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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 카드의 선은 오른쪽 카드의 3개 선중 어느 선과 가장 비슷해 보이는가? 당연히 C다. 하지만 같이 문제를 푸는 사람들이 모두가 A라는 답을 내놓는다면 어떨까? 그래도 나는 자신 있게 C라고 답할 것 같다고 다들 생각한다. 하지만 실험 결과는 참가자 중 75%가 적어도 한 번은 집단에 동조하여 오답을 말했다. 이 글을 쓰는 나도 그렇고, 읽는 여러분도 그렇고 이 문제는 분명 C라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문제라면 어떨까? 분명해 보이는 문제마저도 이렇다면 분명하지 않은 문제는 타인의 영향을 더 받지 않을까? 분명 어느 순간 우리는 대중이 된다. 타인의 선택을 우리는 판단에 유용한 지름길로 삼는 경향이 있다.


우리의 선택은 자기 자신이 온전히 사고하여 판단하였다고 생각한다. 나의 기호와 합당한 사유로 인해서 선택을 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많은 경우 우리는 타인의 선택에 영향을 받는다. 나는 내가 합리적으로 판단하여 이 물건을 구입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이유는 언제든지 찾을 수 있다. 사야 할 이유, 사야 하지 않아야 할 이유 모두 찾을 수 있다. 혹시 그 물건을 보기 전부터 그런 물건을 사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필요에 의해서 구입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필요에 의해서 구입했다고 착각을 한다.


나 역시도 마찬가지다. 동료가 무접점 키보드를 가지고 있어서 써봤는데 뭔가 쵹쵹쵹 하는 타건감이 좋았다. 내 키보드와 그 키보드의 차이가 무엇일까? 있기는 하다. 블루투스 연결이 되고 사이즈도 작다, 타건 깊이도 조절이 되고 반발력도 조정이 된다. 하지만 기본적인 기능, 즉 타이핑을 한다는 기능은 전혀 다르지 않다. 그 키보드를 써보기 전까지는 노트북 키보드만 해도 좋다고 생각했던 나인데 이제 내 키보드는 구식이 되어버렸다. 동료가 옆에서 썼을 뿐인데 내 인생은 그 키보드를 보고 난 전 후로 달라져 버렸다. 이젠 예전 키보드로 돌아갈 수 없다.

IMG_6432.jpeg 과연 합리적인 소비를 한 것일까?




이렇게 선택의 순간 본능적으로 타인과 같아지려는 한편, 달라지려고 하기도 한다. 10대는 적극적으로 부모와 달라지기 위한 선택을 한다. 다른 선택으로 스스로를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러한 차이도 특정 시각으로 바라볼 때 오히려 유사성이 더 많은 경우를 볼 수 있다. 남들이 보기에는 다 같아 보이는데 약간 다른 것으로 자신을 특별하게 생각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모두 검은색 스마트폰을 쓰는데 나는 빨간색을 쓰는 것을 선택한 것처럼 말이다. 다른 색으로 나는 남들과 다르다는 특별함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그냥 같은 스마트폰인 것이다. 기본적인 기능은 전혀 다르지 않다.


에어팟이 왜 흰색만 지금 출시되고 있을까? 왜 다른 색을 내놓지 않을까? 지금은 에어팟을 사용한다는 것 자체만으로 소비자에게 특별함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닐까? 하지만 조금 더 시간이 지나 모든 아이폰 사용자가 에어팟을 사용하게 된다면 이제 특별함을 느낄 수 없기 때문에 가장 차별화하기 편한 '색깔'로 사용자에게 특별하다는 경험을 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흰 에어팟도, 검은 에어팟도, 빨간 에어팟도 모두 같은 소리를 들려준다.




관점에 따라서 우리는 같아지기도 하고 달라지기도 한다. 본능적으로 자신을 원하는 집단에 속하면서도 그 집단 안에서 개인으로 구분되기 위해 그 그룹 내에서 남들과 나의 차이를 만든다. 그리고 각 개체들은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나를 동기화시키기도 하지만, 개인으로 존재하기 위해 타인과 차이를 만들며 집단은 성장하기도 퇴화하기도 한다. 가까이서 보면 동적 평형 상태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의 범위를 넓히면 무수한 외부요인이 일어나는 현실에서 동적 평형 상태가 존재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래서 대중의 인기는 포화되었다가도 그게 어느 순간이었나 싶을 정도로 빠져버린다. 덧없다. 물론 대중의 선택을 받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실력은 갖추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평행세계를 만들어 봐도 실력이 없는 노래는 멜론 1등을 할 수 없다. 대중은 1등 할 수 있는 노래는 예상할 수 없어도 1% 안에 들지 못하는 노래는 기가 막히게 구분해 낼 수 있다. 그러면 콘텐츠 생산자가 할 수 있는 비교적 바람직한 전략은 최소 퀄리티 수준을 확인해야 하고, 그 안에서 콘텐츠를 생산, 수정하며 대중의 기호를 실험하는 방법이 있을 것이다.


실력만으로는 대중을 사로잡을 수 없다. 해리포터의 작가인 J.K. 롤링은 해리포터의 성공 이후 더 쿠쿠스 콜링(The Cuckoo’s Calling)이라는 추리소설을 로버트 갤브레이스 (Robert Galbraith)이라는 필명으로 발간한 적이 있다. 그러면 저 책은 성공했냐고? 초판은 1,500부에 불과했고 J.K. 롤링이 발간했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에 판매량이 급증했다. 합리적인 소비자가 시장에 많다면 책은 필명 공개 이전에 어느 정도 판매량을 기록했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책의 퀄리티 판단을 소비자가 일일이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대가 되었다. 결국 불확실한 상황에서 선택을 하는 경우 우리는 타인의 선택을 본능적으로 참고하게 된다.




우리의 행동은 타인의 선택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다. 영향을 받지 않으려 노력해도 그렇게 진화해 왔기에 단기간에 바뀔 수 없다. 비교적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어떤 대상에게 영향을 받을 것을 선택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 역시 대중이 된다는 것을 인지하면 스스로를 특별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이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미 다수이기 때문에 나는 또 다른 대중이 된다. 그렇게 생태계는 진화한다.




Reference.

<보이지 않는 영향력 - 조나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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