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카를 찍지 않는 사람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보다 우선되어야 하는 것

by 경규승

글을 쓰는 것이 힘든 날이 있다. 글을 쓰자고 생각을 하자마자, 글을 쓰고 싶지가 않다.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 보고 싶다는 유혹이 날아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쓴다. '내가 어떤 상태에 있다는 것'과 '내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은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물론 인지부조화로 인해 쉽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뇌는 적응을 잘하기 때문에 행동을 하게 되면 생각은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일이 아무리 힘든 날이라 하더라도 일 하다 보면 어느 순간 일에 집중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오늘도 글을 남긴다. 생각을 하기 위해 나는 글쓰기라는 행동을 한다. 글쓰기를 하지 않더라도, 생각의 전개를 머릿속으로 잘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의 생각은 언제나 움직이고 불명확하다. 불명확한 것을 현실에서 인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행동한다, 글을 쓴다. 아름다운 시상이 떠올랐다고 해도 결국 그 시상을 표현하는 것은 단어이다. 아웃풋을 남기지 않으면 내가 생각했다는 사실마저 사라져 버린다. 그렇기에 내가 감정과 기분을 인지하는 것과는 별개로, 일을 해야 할 경우는 그냥 하고 보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첫 번째 원칙은 절대로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자기 자신은 속여먹기 가장 쉬운 상대이다.


파인만 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이다. 자신을 속이지 말라는 말씀으로 하셨을 것 같다. 그만큼 자신을 잘 속여먹어서 행동하게 하는 것이 쉽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의 감정과 행동을 분리해서 모순 속에서 인간은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와 '나는 어떤 일을 성취하고 싶은가' 역시 구분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저 두 가지를 구분하지 못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존재할 것이냐', '행동할 것이냐'의 문제로 이어진다. 어떤 특징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것일까, 아니면 어떤 일을 해낸 사람이 될 것인가. 똑똑한 사람이기보다는, 기술을 활용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경험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라는 특징은 묘비에 새겨 저서 내 무덤이 없어지면 그냥 사라져 버린다. 하지만 어떤 일을 해결했고 그 결과 세상의 시스템에 반영이 되어 있다면 나는 영생을 살아갈 수 있다. "이거 처음에 적용한 사람 누구야? 이거 히스토리 아는 사람 누구야?" 라며 이야기하며 내 이름이 나오길 바란다, 그것이 비판일지라도. 그렇게 나는 세상에 실체 있는 이야기를 남기고 싶은 사람이고 싶었다. 존재는 소멸한다, 업적은 칭송받는다.


하지만 나는 어떤 일을 이룬다는 목적의식보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내가 어떻게 보이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이 컸던 것 같다. 강한 에고, 즉 나는 특별한 존재라는 믿음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 것이 목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한다는 순서로 지금까지의 목표가 설계된 것 같았다. 하지만 순서가 달라야 한다고 한다. 내가 어떤 것을 이루는 것이 온전한 목적이 되어야 한다. 그 과정 속에서 나의 모습은 부차적이다.


조지 마셜의 일화를 보자(마셜 플랜(세계 2차 대전 이후 미국의 유럽 원조 계획)의 그 마셜이다). 그는 군 장성이며 정치가이었기에 이런저런 이유로 초상화를 남겨야 하는 일이 있었다. 그림이 완성되자마자 마셜은 자리에서 일어나 곧바로 나가려고 했다. 화가가 그림을 보지도 않고 가느냐고 물었으나 마셜은 "예, 됐습니다."라고 하고 자리를 떴다. 한 번의 잘 나온 사진을 건지기 위해 수십수백 장의 셀카를 찍으며 자기 얼굴을 확인하는 데, 마셜은 자신의 초상화를 확인할 시간조차 아깝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자신의 에고를 강화하는 대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집중력을 유지하는 것을 선택했다.




몇 번은 실력과 운과는 관계없이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성공은 사람을 취하게 만들어 버린다. 성공은 에고를 더욱 강화시킨다. 내가 성공방정식을 깨달았다고 착각한다. 젊은 시절 석유왕 록펠러는 초년에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다. 막대한 부로 인해 스스로 우쭐해 질 수도 있었지만, 그는 그런 기분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과의 대화를 하며 스스로를 다잡아가며 균형감각을 길렀다.


강한 에고는 나를 좀먹게 한다. 에고는 내가 무엇이든 될 수 있다고 속삭인다. 잘했을 때는 모두 내가 잘나서 이뤄진 것이며 나는 그에 응당한 대우를 받을 가치가 있다고 속삭인다. 아주 작은 성취를 놓고서도 성공을 이뤘다고 스스로에게 취하기도 한다. 결과를 보고 나서는, 성공을 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들이 모두 다 의미 있어 보인다. 우연한 계기로 성취하게 되었던 지식이나, 무작위로 결정했던 선택도 어느 순간 자신이 의도했던 방향이라고 기억을 조작해 버린다. 스스로를 불확실성이 난무하는 세계에서 기회를 엿본 현자로 만들어 버린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스스로 신화를 써버 린다.


다른 사람의 성공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위대한 성공을 이룬 사람들을 볼 때 처음부터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고 싶어 한다. 그래야 계획을 세우는 즐거움도 가지고 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렇게 믿어야 앞으로 있을 성공의 원인이 나에게 있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나의 성공이 온전히 운 때문이었다고 자신의 업적을 평가하기는 쉽지 않다. 일에 집중을 하고 목표에 집중을 해서 성취를 했다고 하더라도, 결과는 내 의도대로 된 것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냥 그런 성공이 있었을 때 내가 우연히 거기에 있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누구나 성공을 바란다. 그리고 그 성공의 열매는 너무도 달콤해 매번 맛보아도 질리지 않는다. 끊임없이 성공을 열망한다. '이 정도면 괜찮아'라고 생각하며, 박수칠 때 떠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렇기 때문에 한 번의 성공에서 끝날 것이 아니라면 성공의 지속가능성 역시 고려해 봐야 한다. 그리고 에고는 지속 가능한 성공을 방해하기 십상이다. 현재의 성공까지 데려다준 그 확신은 이미 낡은 것이다, 하루에 두 번 맞는 시계처럼 정확하지도 않을 가능성이 높다. 어느 순간 자신의 자산이라고 생각했던 확신은 부채가 되어버릴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행동에 집중을 하는 것이, 성공 확률을 모르는 세상에서 결과를 남기기 유리하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결과를 만들고 흘러가게 두어라. 인정받고 보상받는 것은 부차적인 일이다. 그저 일을 하는 것 만으로 충분하다.




Reference.

에고라는 적 - 라이언 홀리데이

https://www.facebook.com/EgoIsTheEne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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