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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글라라 Aug 30. 2021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모두를 위한 부드러운 안전망을 소망한다.


오전 9시. KBS FM 김미숙의 가정음악을 들으며 나의 하루는 시작된다. 3월의 어느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가정음악 오프닝 시를 듣다가 '뜨거움을 견딜 부드러운 털을 키웠다', '가장 작으면서 아름다운 동물이 되었다'는 문장을 만났다. 귓가에 닿는 순간 입안을 맴돌며 읊조리다 뇌리에 깊이 스며들었다. 오래도록 잊히지 않고 기억되는 문장이다. 사막여우. 도대체 어떤 동물일까, 호기심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한낮의 뜨거움, 밤의 추위, 일교차가 큰 사막에서 가장 큰 귀를 가지고 있는 가장 소형의 동물. 발바닥에 부드러운 털이 있어 사막의 뜨거운 모래로부터 피부를 보호하고 모래 위에서도 발이 빠지지 않고 이동할 수 있으며, 먹이에 존재하는 미량의 수분만으로 버티며 물의 부족을 견디어 내는 사막여우.

뜨거운 여름을 보내며 사막여우의 생존 방법을 곰곰 되짚어본다. 코로나 확산 위기, 지금 넘어야 할 이 난관이 사막의 뜨거움과 같다면 사막여우처럼 뜨거움을 견딜 부드러운 털을 키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며.  


코로나 불안으로 집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아파트에서만 갇혀 지내면서 답답함을 호소하는 60대 여성의 전화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오래전에 남편과는 이혼하고 하나뿐인 아들은 결혼해서 분가하고, 공공임대아파트에서 혼자 사는 여인이었다. 동네 슈퍼에 쌀을 배달 주문했더니 직원이 물건을 가지고 왔는데 현관문을 열고 나가보니 배달원이 마스크를 안 쓰고 왔더란다. 얼굴을 외면하고 얼른 물건만을 받고서 현관문을 급하게 닫았는데, 혹시나 하는 불안이 있다고 했다. 슈퍼 사장에게 항의 전화를 했단다. 직원이 마스크도 안 쓰고 배달을 보내면 어떡하냐고 볼멘소리로 불평했더니 앞으로는 지시 감독 잘하겠다며 전화를 끊더란다. 이 여인은 종종 상담전화를 하는 분이신데 신경증적 불안이 있다. 아파트 아래층에서 담배연기가 올라온다고 한여름에도 거실 창문을 열지 못하고 닫고만 지내시는 분이다.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것도 사람을 만나게 될까 불안해서 늦은 밤 아무도 없을 때 얼른 갔다 오고 산책도 못 나간다고 하소연한다. 정부의 방역지침에 대한 불만이며, 마스크를 안 쓰고 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불만까지 숱한 불평을 성토하셨다. 배달원 남자가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마치 바이러스 전파자인 것처럼 흥분해서 헐뜯는데 내게는 그 말들이 배달원에 대한 혐오처럼 느껴졌다. 마음이 착잡하고 씁쓸했다. 마스크 착용 않고 배달을 갔던 그 남자의 실수를 두둔할 마음은 아니다. 오죽하면 그 배달원이 마스크 착용을 잊었을까. 배달원과의 대면 접촉을 조심스레 피하면서 다음에는 마스크 착용을 잊지 않도록 부드러운 말로 권유할수는 없었을까.

   

작년 여름, 코로나 시국에 이사를 하게 되면서 이삿짐을 옮길 때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이삿짐센터 직원들이 마스크 착용을 하지 않고 있다고 아파트 관리실로 항의가 들어간 것이다. 엘리베이터에서 한 사람이 고함을 지르며 지적을 해서 직원들은 연신 죄송하다고 굽신거려야 했다. 아파트 주민 입장에서야 충분히 그럴 수 있겠지만 한번 더 생각해보면 뜨거운 여름날 마스크를 쓰지 않고 있던 그분들의 심정 또한 이해할 수도 있지 않을까. 방역관리지침을 따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지적하고 마스크를 쓰도록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폭언이나 비난 섞인 지적인 아닌 따뜻하고 부드러운 말로 요청할 수는 없었을까. 지적은 왜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하는 걸까.  


얼마 전, 열여덟 살 작은딸에게서 택배 아저씨와 있었던 일화를 전해 들었다. 딸은 택배 주문한 물건이 그날 2시경에 도착 예정이라고 문자가 뜨길래 4시 약속 나갈 때 입고 갈 수 있겠구나 생각하고는 들뜬 마음으로 기다렸단다. 3시가 다 되어서도 물건이 도착하지 않아서, 어디쯤 왔나 확인해보려고 택배 아저씨에게 전화를 했는데, 택배 아저씨는 전화를 받자마자 다급한 목소리로 “아파트 입구요.”하고는 전화를 끊더란다. 내 생각에는 당황하고 기분이 상했을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오히려 딸은 택배 아저씨가 배송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 독촉 전화까지 받으면 얼마나 신경이 쓰이고 조바심이 날까 싶은 생각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그래서 냉장고에서 바나나 우유 하나를 꺼내 쪽지에 미안하고 고맙다는 글을 남기고는 현관문 밖에 놓아두었단다. 잠시 후 초인종이 울리고 나가보니 택배 물건만 현관 앞에 놓여있고 바나나우유와 쪽지는 사라지고 없어진 것을 보고는 아저씨가 가지고 갔구나 싶어서 기분이 좋았다며 딸은 생글생글 웃었다.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잠시 후에 택배 아저씨에게서 '고맙습니다. 잘 먹겠습니다'라고 문자 메시지가 왔고, 딸은 문자를 받고 나서 기분이 더 좋아졌단다. 이야기를 듣는 내 마음도 훈훈해졌다. 택배 아저씨와 어린 딸이 서로 주고받은 친절은 안전하고 편안해서 참 아름답게 느껴졌다. 부드러운 털로 사막의 뜨거움을 견디는 사막여우처럼 아이의 작은 마음에서 부드러움의 가치와 미학을 배웠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서 여름 징역살이 대해 읽었던 것이 기억난다. 감옥에서 옆사람의 체온으로 추위를 이겨나가는 겨울철의 우정과는 대조적으로 여름 징역살이는 옆사람을 37℃의 열 덩어리로 느끼게 하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 서로 미워하고 미움받는 불행을 낳게 된다고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을 향한 '부당한 증오'는 감옥에서의 여름 잠자리에서만이 아닌 듯하다. 생활 곳곳에서 증오의 감정과 대상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때가 있음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노동 현장에서 시간에 쫓기고 무거운 노동 강도를 견디며 땀 흘리는 노동자에게 마스크 착용 안 한 것에 대한 비난과 혐오의 반응이 아니라 따뜻한 배려, 친절한 권유가 있는 부드러운 사회 안전망이 갖추어지기를 소망해본다. 코로나 시국에 마스크 착용은 자기 보호 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기본 예의이며, 모두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중요하다. 방역지침을 준수하여 자기를 보호하면서, 이와 더불어 부당한 증오가 아닌 부드러운 친절과 상호존중, 따뜻한 가슴을 키운다면 작으면서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부드러운 털로 사막의 뜨거움을 견디며 가장 작으면서 아름다운 동물이 된 사막여우처럼, 작으면서 아름다운 마음을 지닌 사람이 많아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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